그날 이후, 나와 레나는 자주 만났다.
술집에서 그저 손님과 직원으로만 스쳐 지내던 사이였는데,
언제부턴가 강가를 함께 걷고 있었다.
레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가 입양되었지만,
양부모의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지금 다니는 술집 사장님이
그런 레나를 좋게 보아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엔 돈도 적었지만
일처리를 하나둘 배워가면서
조금씩이나마 받는 돈이 오르고 있다고 했다.
나와 자란 환경이 비슷해서였을까.
우린 서로를 쉽게 이해했다.
무엇보다 레나는 흔히 사람들을 옥죄는
“이건 이래야 한다, 저건 저래야 한다”는 시선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착한 아이가 되려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설교하듯 내뱉는 말들,
혹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자부하는 아이들이
각자의 환경에 대해서 살피지 않고
성경 구절이나 도덕 교과서에 기대어
남을 쉽게 판단하는 모습.
레나는 그런 세계와는 달랐다.'
비록 아는 것은 많지 않더라고
세상을 직접 보며 자랐다.
아는 것은 많지만 세상은 모르는 사람이 있고
아는 것은 없더라도 세상을 아는 사람이 있다
적어도 내 눈 레나는 후자다.
이 여린 몸으로 세상과 드잡이 하며
사람을 배워나갔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말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그녀의 세상은 나를 안정되게 한다.
기실 그녀에게 나의 존재 또한 그럴 것이다.
레나와의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요한도 함께였다.
우리는 셋이서 자주 어울려 다녔다.
요한은 말주변이 좋아
어색한 분위기를 쉽게 녹였다.
만약 요한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레나와의 관계 또한 이렇게 빨리 깊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요한은 우리 둘 사이를 배려한 듯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다른 이유는
그에게도 만나는 여자가 생겼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진심으로 축하는 했다.
이미 다른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축하의 마음은 식었다.
누구의 아이인지, 어떻게 아이를 갖게 되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투와 행동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불편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몸을 팔아 쉽게 돈 번다고 욕지거리를 하지만,
몸만 팔았겠을까.
웃음 팔고, 어릴 적 품은 미래를 팔고, 건강을 팔고
소중한 관계의 신뢰를 팔아 번 돈이다.
오히려 만만한 삶이 아니라 대단하다 생각했다.
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피부로 겪고 나니 달랐다.
요한이 그런 사람을 안 만났으면 했다.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
나는 꽤 오래 방황했고 지금도 방황 중이다.
어떨 때는 타인을 괴롭히기도 했고
사람들을 이용해 나의 편의를 챙겼다
그런 나는 벤노를 만나며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했고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게 했다
삐뚤어진 길을 걷던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한 사람이다
벤노는 나를 못나지 않게 만들었다면
레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물론 레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고도 좋다고 할 것이지만
레나는 어느 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젠가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
크로머, 너 같은 아이도 함께 다니는 학교 말이야"
"나 같은 아이가 뭔데?"
"선생님 말 안 듣는 아이"
"퇴학당하는 아이?"
레나는 봄바람처럼 웃었다.
“나 같은 아이도, 버려지고 상처 입은 아이도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학교.
성경 구절이나 도덕 교과서에서 말하는
빛만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래야만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학교는 원래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야"
"알아. 그래서 만들어 보고 싶은 거지!
그래서 나는 다시 학교를 가보려고 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술집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며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맥주잔과 그릇을 양손에 들고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
힘들어도 힘든 티 내지 않는 그녀의 얼굴.
언제든 볼 수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춰진 마음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속에는 아이들을 이끄는 선생의 모습이 있었다.
따뜻해 보였다.
그 얼굴이 희미하게 번지더니
곧 레나의 얼굴과 겹쳐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학교는… 이제 우리 나이가 돼서 아마 쉽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떤 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대.”
“뭐야, 너도 알아본 거야?”
“계속 이 일만 할 수는 없잖아.”
레나는 잠시 웃으며 물었다.
“너는 학교를 위선덩어리라고 욕하면서, 왜 그런 거야?”
“…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그런데… 부럽잖아.”
레나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깨끗한 척하는 선생이나 학생들이 더럽긴 하지.
그런데 나도… 그 속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너는 솔직해.”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레나가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
“약속하자. 다시 공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