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은 한 젊은 여성의 성장과 냉혹한 현실을 한 계절의 흐름 속에 담아낸다. 19세기 말, 문화적으로 폐쇄적인 뉴잉글랜드의 시골 마을 노스도머. 약 17세의 주인공 채리티 로열은 이 마을의 단조로움과 답답함에 권태를 느끼며 탈출을 갈망한다.
채리티의 정체성은 그녀의 후견인인 로열 변호사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 있다. 로열 변호사는 어린 시절 채리티를 '산'에서 구해준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산'은 가난과 위험, 무법의 상징으로 그려지는 공간이다.
이 관계는 어느 날 밤, 로열 변호사가 채리티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하며 결혼을 청하는 사건을 계기로 파탄에 이른다. 그동안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었으나, 이 순간부터는 나이 든 남자가 어린 여자를 향한 욕망으로 다가온다. 이 사건은 채리티의 의존성이 경멸과 혐오로 변하며, 마을을 떠나려는 그녀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도시 출신의 세련되고 교양 있는 젊은 건축가 ‘하니’가 나타나면서 균열이 생긴다.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은 끌림으로 이어지며, 마을을 떠나고 싶은 채리티의 갈망과 연결된다. 노스도머가 갖지 못한 모든 것, 즉 더 넓은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하니가 채리티에게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지적, 감정적 세계를 안내하면서 깊어진다. 버려진 낡은 집에서의 밀회는 채리티에게 성적, 감정적으로 깨어나게 한다. 이들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채리티에 대한 소유욕을 가진 로열 변호사와의 갈등 또한 고조된다. 그는 하니를 일시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질투하며, 결국 자신의 집에서 하니를 내쫓는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하니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와 함께 찾아온다. 그는 약혼녀가 있었고, 그런 자신의 문제를 정리하고 돌아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것이 공허한 약속임을 직감한다.
이 사건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정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 하나 더 남았다. 바로 채리티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하니와의 관계, 마을과 후견인에 대한 환멸. 이런 파멸적인 감정 속에서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그녀는, 그토록 경멸했던 자신의 출생지인 '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과 마주하고, 자신이 태어난 곳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다. 자신의 아이를 이런 가난 속에서 키울 수 없음을 절감한다.
절망에 빠진 채리티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로열 변호사였다. 그는 열정이 아닌 실용적인 보호를 제안한다. 그는 채리티와 그녀의 뱃속 아이에게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적 평판을 지켜주기 위해 결혼을 제안하고, 그녀를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바로 그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소설은 채리티가 하니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그녀의 미래는 사랑보다 안전을 위한 결합 속에 묶이게 된다.
채리티의 정체성은 "가난, 위험, 야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산'에서의 출신이라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이 배경은 그녀에게 사회적 열등감과 소속감의 부재를 심어주었다. 그녀의 이름 '채리티'조차 로열 변호사가 부여한 것으로, 그녀의 의존적 지위를 상기시키는 낙인으로 작용한다. 그녀는 교양 있는 하니와의 사이에서 결코 메울 수 없는 격차를 느끼며, 세련된 애너벨 볼치(하니의 약혼자)와 자신을 비교한다.
여기서 '산'은 채리티가 내면에 지니고 다니는 심리적 풍경이다. 그것은 그녀가 벗어나려 애쓰지만 끝내 실패하는 사회적 결정론의 한 형태를 상징한다. 따라서 하니에 대한 끌림은 낭만적 감정을 넘어선 정체성에 대한 열망이다. 그는 다른 계급, 다른 세계, 그리고 그녀의 '오염된' 출신을 정화시켜 줄 가능성을 상징한다. 비록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 만나는 사람(연인, 친구, 동아리 등)이 ‘좋은 출신’, ‘좋은 능력’, ‘좋은 외모’, ‘좋은 경제력’같은 배경을 가졌다면, 자신의 자아가 만나는 사람과 동일시 되는 현상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이 만남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점에 있다. 결국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산’을 직면하고픈 강렬한 욕망과 함께 돌아와 로열과의 결혼으로 회귀하는 그녀의 여정은, 벗어나고자 했던 사회적 계층 안을 수용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채리티는 마을을 떠나기 위해 돈을 벌어야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일에 책임감 있게 임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필요하여 부탁한 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여전히 단조로운 일상의 일부이자, 마을의 상징에서 머문다.
일에 대한 채리티 태도가 나타나는 지점은 도서관에 하니가 나타나 채리티에게 어떤 책에 대해 묻게되는 지점이다. 채리티는 그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말한다. 이런 모습은 하니가 자신에게 비난하거나 지적한다고 느끼며 책임을 희석하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책임감 회피, 지적으로 세련된 하니의 질문을 공격으로 인식하고 방어기제를 작동하는 문화적 열등감, 채리티가 그토록 원했던 도서관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지루한 일상의 상징으로 머물며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도서관에 대한 심리를 해석할 수 있다.
하니는 교양 있고 세련된 도시 출신으로, 노스도머의 모든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여름의 연애를 즐기는 위선적 인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여름의 일탈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 속 순간만큼은 채리티에 대한 그의 애정에 진실성이 보인다. 이런 그의 이중적인 모습은 악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한 여름의 충동적인 일탈, 또는 자신의 계급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약함. 약혼녀를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와 책임감에 대한 회피에서 비롯된다. 그로인해 그의 약속은 그 순간만큼은 진실성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자신의 나약함과 책임감을 대하는 태도를 바로 보지 못해 생긴문제다. 그로 인해 그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뱉게 된다.
이러한 그의 위선은 채리티에 대한 거짓된 감정이라기 보다, 관계가 갖는 무게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결국 이 관계는 여름의 낭만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인해 채리티의 삶은 송두리채 바뀌지만, 정작 하니 자신은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는 특권층이 보여주는 무심한 권력의 상징성으로 비춰진다. 그의 퇴장은 남아 있는 자가 책임지는 일이었다.
그의 완전한 퇴장은 남아 있는 자가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아는 순간, 즉 채리티가 하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장면이다. 더 이상 이 관계를 계속할 책임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순간, 그의 마음은 채리티에 대한 미안함도 있겠지만, 채리티가 대신 선택해 준 덕분에 생긴 선택이 준 무게에 대한 해방감을 느꼈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선택의 순간에서 적극적이지 못한 그의 모습은 어찌되었건 그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니
로열 변호사 또한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ㄹㅇ 이 소설의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모순적으로 보임) 그는 처음에 채리티에게 혐오감을 주는 늙은이로 묘사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니와의 관계에서 채리티가 처한 현실을 꿰뚫어 보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며, (로열 입장에서는 채리티와 하니가 안 되어야되니까 나쁘게 말한 것 일 수도) 반갑지 않은 방식으로나마 그녀를 보호하려 한다. 그의 마지막 행동은 그녀의 평판과 아이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방패를 제공하는 구원의 행위이다. 경멸의 대상에서 마지못한 공감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로열 변호사는 두 얼굴, 즉 '소유'와 '보호'를 동시에 구현한다. 그의 초기 접근은 피후견인에 대한 소유욕적, 성적 지배의 표현이다. 그의 마지막 행동은 보호를 명분으로 한 사회적 지배의 표현이다. 그의 구원은 처음 보여주었던 혐오스러운 본성이 변한 결과가 아니라, 그의 권력이 표현되는 방식이 채리티의 육체에 대한 위협에서 그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방패로 전환된 것을 보인다. 그는 채리티의 낭만적, 개인적 욕망을 부정하고, 자신의 의지와 사회적 필요성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로열은 소설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실용적이며 때로는 추악한 사회 구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능할 수 다. 교도관인 동시해 안전한 감방을 만들 수 있는 자이다. 채리티가 그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낭만적 반란에서 가부장적 거래(안전을 대가로 한 복종)를 실용적으로 수용하는 그녀 자신의 여정을 은유한다.
결말에 대한 해석으로는 “한 소녀의 성장이 아닌 체념”도 있지만, “현실도피가 아닌 수용을 통한 성장”으로 보기도한다. 그만큼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첨예하다. 분명한 것은 채리티의 마지막 선택은 소극적이나마 자신의 주체성을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주체성은 가부장적이고 계급적인 사회의 한계 내에서만 작동한다. 그녀가 겪는 '성장'이란 낭만적 환상을 고통스럽게 벗어던지고 이 제약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결말은 성숙한 책임감의 발현인 동시에 비극적 포기다. 이는 작가가 그린 사회적 위치와 연결되어 있다.
<여름>은 상황에 의해 짓밟힌 한 영혼의 비극, 그리고 생존과 모성적 결단의 조용한 성장이다. 그녀의 최종적인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냉혹하고 명료한 시선으로 확보한 생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