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먹을 쥐지 못했다.
무서운 아버지 때문인지,
무기력한 어머니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화가 나면 손부터 올렸다.
나를, 물건을, 벽까지 뭐든지 때려 부쉈다.
그래서 내게 주먹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보다도 진짜 이유는
주먹을 볼 때마다 나를 때린 그가 생각 나서다.
아픈 기억이다.
맞는 것은 괴롭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주먹에 맞는 걸 보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주먹을 날리는 사람이 되었다.
.
쉬는 시간이었다.
누군가 내 의자를 발로 찼다.
“야, 넌 왜 맨날 멍 때려? 신 안 믿냐?”
작은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목소리에 감정이 섞였다.
고개를 들었다.
프리츠였다.
키가 나보다 한 뼘 작지만,
목소리는 유난히 큰 친구다.
그는 군중 속에서
약한 애를 골라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의 괴롭힘은 장난처럼 시작해
조금씩 과해진다.
그리고는 상대를 울게 만들곤 했다.
처음부터 강한 장난이었다면
이미 도망치거나 선생님을 부를 친구들도 꽤 있겠지만,
경계를 애매하게 넘기며 장난친다.
하지만 그 끝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데로
놀이감을 만드는 똑똑한 놈이다
또한 주변사람들을 이용도 잘한다.
작은 실수를 과장해 떠벌리거나
남의 흉을 입에 올려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다 상대가 울음을 터뜨리면
오히려 더 큰소리로 웃으며,
마치 자신이 이긴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때 그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차있다.
자연스럽게 그는 힘이 약한아이지만
가장 위에 있는 아이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프리츠의 그 상대가
내가 된 것 같았다.
프리츠 보다 덩치가 있었기에
나를 건들지는 않았다.
건들더라도 그의 성격상
이렇게 급진적으로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래서 프리츠가 나에게 왜 시비를 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조용해서 유약해 보였던 걸까?
이 치밀한 독사가 자신의 독사인지 모르고
스스로를 용으로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프리츠의 눈빛과 말에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를 향한 발길질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격과 다른 행동에
생각할게 많아서다
그리고 이 이유는 아마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과 관계있다.
아버지의 고함에
음식을 구걸하러 갔던 집 중에
프리츠의 집도 있었다.
손을 두드리니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서 나온 따뜻한 기운에
잠깐 우울했다.
문을 연 키 큰 여성은 프리츠의 어머니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칠 때,
확실히 그 눈빛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눈이었다.
"얘야, 잠시만 있어봐."
집으로 다시 들어간 그녀는
잠시 뒤 작은 바구니에 음식을 담아 나왔다.
검게 구운 호밀빵과 약간의 감자 수프,
그리고 얇게 썬 치즈 한 조각이 흰 천 위에 놓여 있었다.
수프에서는 은근한 허브 향과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손끝에 전해진 온기가 낯설 만큼 따스해 차마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음식 바구니에 향했던 시선을 올렸다.
그때, 그녀 뒤에 있던 프리츠와 눈을 마주쳤다.
친하지도 않았기에
딱히 인사를 하지 않았지만,
몇 초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불안한 눈이었다.
이 따스한 음식과 저 눈빛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 괴리에서 오는 버벅에
나도 모르게 그의 눈을 피했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챙겨 먹으렴."
그녀의 따스한 미소와 말은 감격스러웠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뒤로 돌아섰다.
문틈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애는 열심히 살아가는데,
넌 나를 실망시키는 것만 하는구나!"
따스한 말을 건넸던 그녀는
프리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혼을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의 밝고 따뜻한 기운에 우울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섬뜩했다.
이 미소는 따뜻한 수프 때문이 아니라
혼이 나는 프리츠의 상황 때문임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왜 프리츠가 나에게 시비를 거는지 이해되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프리츠는 혼이 났고,
그로 인해 화가 난 것이다.
"하긴... 신을 믿지 않으니
네가 그렇게 구걸이나 하고 살아가는 거야"
"..."
"넌 신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야!"
신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문제 되지 않았다.
구걸도 상관없었다.
또 다른 폭력으로 통제받는일이 두려웠다
그리고 짜증났다.
나는 눈쌀을 지푸렸는데,
그 모습에 흠칫한 프리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나를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 달려들면 이 아이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저릿했다.
이 느낌은 아버지가 나를 때리기 전의
그 느낌과 비슷했지만,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무기력했고
지금은 주체할 수 없다.
그리고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감정이 내 안을 삼켰다.
“뭐라고 새끼야?”
나의 주먹이 프리츠의 얼굴을 향했다.
“내가 병신인줄 알아?”
순간,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경멸하며 비웃던 얼굴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입술은 터져 붉은 선이 번졌고,
눈가가 일그러져 더 이상 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순간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발을 그의 허벅지를 향해 찼자.
그는 바닥에 쓰러지며 한 손을 얼굴을 감쌌고,
다른 한 손은 자신의 허벅지를 감쌌다.
그 동작은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짐승의 발버둥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크지 않았다.
떨리는 숨소리와 억눌린 신음만이 들려왔다.
그 커다란 목청은 사라지고,
교실에 울려 퍼진 것은 나의 심장 박동뿐이었다.
쓰러져있는 프리츠의 눈이 보였다.
나를 무서워하는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볼 때의 내 눈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소리 내지 않았다.
몇몇은 책상 위에 굳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몇몇은 눈을 크게 뜬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 아이도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아이도 있었다.
교실은 속삭임조차 사라지고,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동정도, 장난스러움도 없었다.
오직 낯선 공포와 경계만이 가득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힘. 두려움. 그리고 통제.
그 모든 게 내 안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쾌감 속에서 살아왔던 것일까?
비릿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
그날 집에 돌아와 방에 혼자 앉았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그토록 혐오했던 아버지의 것을 가졌다.
나는 무엇일까? 괴물이었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두 발로 서는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어떻게 서야 하는지 몰랐다.
오늘은 조금 알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서있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트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어쨌든
힘은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