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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an 21. 2020

우리가 사는 것은

'카페'라는 공간의 본질

따분하기 그지없는 취미를 가진 나지만, 그래도 내세울 만한 말 한 마디 쯤은 있다. 바로 낯선 지역을 방문하면 카페에 간다는 것이다. 꼭 한국과 멀리 떨어진 도쿄나 캘리포니아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가까운 거리의 홍대든 살짝 먼 거리의 수원이든 상관없다.  사람들이 보통 타지에 도착하면 “검색해봤는데, 서면은 ○○곱창집이 유명하대!”하듯, ‘으음. 여긴 또 무슨 카페가 있으려나’하며 주섬주섬 초록색 검색창을 켜는 것뿐이다.


물론, 엄격한 규율의 교도관이 “자. 홍대에 도착했습니다. 30분 내로 A 카페에 들릅니다.” “자. 한 시간 지났습니다. 에그 타르트가 유명한 B 카페로 이동합니다.”하고 외치듯 강박적으로 행동하진 않는다. 카페 주인이나 바리스타라도 그렇진 않을 것이다. 독방을 쓰게 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의도치 않게 일찍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 시간이 붕 뜬다거나, 저스틴 비버만큼이나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즉각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울 때면 ‘으음.’하며 잠시 몸을 숨길 곳을 찾게 된다. 그럼 장소는 빠짐없이 카페다.


“거, 카페야 어디든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연히 다르다.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이곳이 저곳 같고, 저곳은 또 이곳 같겠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선 구석구석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여느 달마시안의 거뭇거뭇한 점박이가 그렇듯.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투박해 보이는 점들도 저마다 매력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다.


카페는 단순히 여러 테이블과 커피로만 구성될 수 없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카페라는 모습을 띈 무언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기본적으로 띠링―(자동문이라면 지잉―) 하며 열리는 문으로는 지긋이 원두의 향이 울려 퍼져야 한다. 내내 흘러나오는 음악에서 눈치챌 수 있는 직원(혹은 사장)의 취향. 창밖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것들과 ‘카페’라는 공간이 아니라면 결코 모일 수 없는 각양각색의 구성원들. 이런 요소들이 집합돼야, 결국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카페라는 공간을 자아낸다. 카페의 구심력이자 본질인 커피의 맛은 오히려 한두 걸음 물러서 있다. ―그렇다고 너무 맛이 없으면 또 곤란하지만.


어느 원두 향은 까무러칠 만큼 향긋하지만, 몇 분이 지나면 콧속을 빠져나가지 않는 그 집착에 싫증이 난다. 이를테면 무더위를 억세게 뚫고 마주한 18도 에어컨 같은 것이다. 당도한 순간에는 ‘하, 살겠다.’ 싶지만 이윽고, ‘으음, 조금 쌀쌀한데.’하다가, ‘으으, 추워.’하는 것처럼. 실로 뛰어난 적응력을 소유한 후각이라지만, 이토록 강한 원두에는 어림도 없다. 마치 “어디 이길 테면 이겨보시지!”하는 자존심만 센 동네 부잣집 꼬마 아이 같다.


가장 좋은 향은 겸손한 향이다. 더 쉬운 표현으론 은은한 향. 정직한 원두로 내린 커피는 여러 테이블 위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줄 안다. 그러면서 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들은 드러내는 법을 모른다. 나 역시 ‘이 카페 향은 참 죽인단 말이야!’ 하지 않아도, 얌전히 내리 앉은 향에 만족하고 나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게 된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겸손한 향은 겸손한 태도를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카페라면 음악 또한 쉬이 떼어놓을 수 없다. 수풀 같은 적막감 속에서 조곤조곤(혹은 왁자지껄) 떠드는 카페는 영 정신없을뿐더러, 그렇다고 로큰롤이나 EDM을 틀어놓는 카페는 제법 요란하다. 손에는 맥주가 들어야 할 것 같고, 집중을 하다가도 “혼자 왔어요?”하고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만 할 것 같다. 뭐, 보나 마나 “흥, 일행 있거든요.” 할 게 분명하지만.


음악은 커피 종류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취향이 존재하니 만큼, 내가 왈가왈부하기는 무척이나 뭣하다. 그래도 한마디 내뱉자면 카페는 역시 인디밴드의 음악이 제일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아니면 적당히 템포 있는 팝송도 나쁘지 않다. 이들 모두 은은한 가림막이 되어주기 적당하기 때문이다. ‘자아. 어디 시작해볼까.’ 생각하며 연필을 들다가도, 근처 어머님들의 ‘어머, 그 얘기 들었어? 뒷동네 교회의 그 목사가 신도랑 바람피우다 딱 걸렸다잖아!’하는 말이라도 들리면 펄럭이는 귀에 나도 모르는 사이 연필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내내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런 곤란한 상황을 적절히 무마시켜준다. 이야기를 소음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어머님들은 어머님대로 각자의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괜찮은 가림막이다. 또한 음악을 뒤로 미뤄두고 작업에 집중하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도 흘러나오면 얻어걸린 복권처럼 피식하곤, 기분이 좋아진다. 직원도 나랑 비슷한 취향이로군. 노래가 별로라면? 살포시 이어폰을 꺼내 들고 공간과 나를 분리시키면 될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카페는 언제라도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니까.


특히 창작하는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작품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창작자를 둘러싼 구조적인 압박이 필요한데, 그런 마음은(특히 젊은 창작자들에겐) 곧 작업실이라는 부재된 공간에 대한 갈망으로 직결된다. 방은 아무래도 별로다. 햇살조차 나른한 이른 오후의 방 안에서 ‘자아. 이제 세상을 놀랠 엄청난 작품을 써보자고!’하며 노트북을 열면, 그동안 영 관심 없던 졸업앨범이 급작스레 보고 싶어 지고, 잘 개어진 침대는 “누워서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술술 나올 거라고.”하며 되지도 않는 유혹의 추파를 건네고 있다. 그때 넘어가 주는 척 “으음… 딱 오 분 만이야.”하며 추파에 답하는 순간, 엎질러진 커피 꼴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시답잖은 유머나 툴툴대는 이 원고를 적으러 카페를 간다. 작업실을 만들기는 무리인 걸 알기에. 심심하면 내다볼 창가에 자리를 잡고, 파파라치를 찾는 저스틴 비버처럼 콘센트를 찾는다. 무얼 마실까, 고민하다가 플랫 화이트를 주문한다. 큰 고민은 필요 없다. 앞서 말했듯 커피는 그저 한두 걸음 떨어진 ‘덤’ 일뿐이다. 나는 직원에게 3500원을 지불하고, 진동벨을 건네받고, 테이블로 돌아온다. 이때 우리가 사는 것은 커피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분위기다.

커피나 음료만을 즐기겠다면, 원두를 구입함으로써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진탕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카페에 머물게 되는 것은 음료, 그것을 넘어 분위기와 공간을 둘러싼 그 시간을 구입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술집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트보다 3배나 비싼 소주 값을 지불하면서 조흥할 수 있는 것은, 술집만이 지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다.


이런 카페는 누구냐에 따라 점토만큼이나 다양한 성질을 갖는다. 시험을 앞둔 이에겐 독서실이 되며 친구들과는 수다한 잡담의 광장이 된다. 창작자에겐 작업실을 제공하고, 연인들에겐 애틋한 감정의 원두를 볶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때에 따라 혼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해서 카페의 본질은 친절함이다. 카페는 항상 그곳에 있고, 철저히 나를 위주로 변화한다. 언제라도 그곳에 들르면 나는 여전하지만, 그곳을 구성하는 모든 주체들은 새로워진다. 새로운 자리,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바깥 풍경. 마치 언제나 새로운 표정을 짓는 내일처럼. 이런 이질적인 분위기는 부담 없이 카페를 찾을 수 있는 나만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분위기다.

우리가 사는 것은 이런 본질적인 이유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동벨이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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