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쳐 봐야 알 수 있는 헌책의 속내
일부 영화인들과 팬들에게 10월은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과 같다. 바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라마단 기간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의무적인 금식을 하며, 날마다 5번씩 기도를 드린다. “어디가 영화제와 비슷하다는 겁니까?”하고 반문하겠다면 직접 가보시라. 새벽녘부터 줄을 서서 영화표를 끊고, 영화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촉박한 시간, 행사의 규모와 대비되게 현저히 적은 식당 수는 반강제적인 간헐적 금식을 이뤄낸다. 더불어 눈이 빠지게 하루 종일 관람하는 영화는 라마단 기간의 기도를 언뜻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라마단에, 아니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나는, 영화라도 질리게 보고 오자는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다만 정해놓은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1) 하루에 영화는 세 편만 볼 것. 2) 이틀 영화를 보면 하루는 여행을 다닐 것. 그 이틀의 여행 중 하루는 필히 보수동 책방 골목을 들리겠다고 다짐한 것은 몰래 정해둔 세 번째 규칙이었다.
나는 신권이 아닌 이상 대부분 중고서점을 애용한다. 이는 중고서점을 좋아해서가 아닌 중고서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금액을 차치하더라도 거기에는 다양한 매력들이 넘쳐난다. 절판된 도서 또는 사고 싶던 책을 마주하기라도 하는 날엔, 깊은 서랍 속에 숨겨둔 비상금이라도 발견한 듯 기쁠 따름이다. 누군가가 접어놓은 페이지나 밑줄을 마주했을 때도 그렇다. 이름 모를 대상의 마음을 어디에서 붙들었는지, 종이 위에 그어진 상흔이 그것을 가리킨다. 예고하지 못한 익명의 소통은 언제라도 즐길 수 있는 부담 없는 요소이다.
그렇기에 버스를 오르는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한층 들뜨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헤어졌지만 이제는 훌쩍 커버렸을 피붙이라도 만나러 가는 심정이었다. 한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책방 골목의 모습은 광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00m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실망감도 잠시. 총 다섯 군대의 서점을 둘러보면서 하루 반나절이나 보낸 나는 짧은 거리의 이유를 온몸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어느 책방에 들어서든 나는, 삼국시대의 돌무덤처럼 쌓인 책들에게 압도당했다. 만일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짧은 비명 한 번 지를 틈 없이 납작해질 것이다. 위협스러운 책들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부모님과 동년배인 고서(古書)부터 지난달에 출간된 문제집까지, 두 세대는 거뜬히 아우를 수 있는 세월의 광대함이 그 짧은 골목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그곳에 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헐값에 일반적인 도서를 구입하러 간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나절 동안 발품을 팔아 총 8권의 책을 구입했다. 흔히들 알 법한 『위대한 개츠비』와 『달과 6펜스』, 문예지 두 권 등을 포함한 여러 문학 서적들. 적으면 17년부터 많으면 44년의 세월을 견뎌온 책들이다. 목적은 대부분 수집이었으나, 여과 없이 발견한 밑줄과 메모를 읽는 건 즐거웠다. 헌책은 표지의 모습만 낡았을 뿐이다. 현재에도 출간되는 고전들과 이제는 중년이 돼버린 작가들의 작품은,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 모습을 그곳에서 철저히 증명했다.
지구 위에 모든 건 시간이 흐르며 회귀본능을 갖기 마련이다.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는 동물처럼 말이다. 진갈색으로 바랜 고서들은 나무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듯 보였다. 더불어 나는 모든 책방에서 균일한 향을 맡았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으나 책에서 나는 향이었다. 마치 카카오 향과 같이 옅지만 달콤한 향기가 오래된 책들에서 뿜어져 나왔다. 낡은 표지는 시간에게 철저히 지배당했지만, 상하지 않고 숙성된 언어는 책의 마디마디 풍미를 더해 고스란히 21세기로 전이되고 있었다.
라마단의 의미는 가브리엘이 무함마드를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기는 것이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의미는 작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나는 헌 책이 갖는 의미를 방향의 갈피를 잡아주는 것이라 하겠다. 장엄히 돛대를 펼치고 앞으로 나아갈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따금 혼란이 오면 차분히 닻을 내리고, 선체 안으로 들어가 헌 책들을 꺼내보리라. 낡은 표지를 조심히 넘기며 지나온 세월의 비법을 남몰래 엿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