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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an 04. 2020

혼자서 여행을 하는 이유

청춘을 판매하는 일이란

8월, 여행을 다녀왔다. 여름이니까. 신발이 젖는 건 싫어도 바다가 보고 싶어 지는 계절이다. 하루는 여수로 내려가 돌산대교가 보이는 밤바다에 앉아 시간을 진탕 허비했다. 둘째 날은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넘어가 어물쩍 하루를 넘겨 보냈고, 셋째 날은 비진도로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반나절이나 들어앉았다. 그리고 뭐가 됐든 생각을 하고 끄적거렸다. 혼자만의 일이다.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은 고3 여름방학이었다. 당시 나는 부산에서 하루를 보내고 통영으로 넘어갔다. 그때는 청소년이라는 제약이 컸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청마(靑馬)문학관*이나 백석 시비(詩碑)** 만을 어슬렁거리며 문학소년다운 행보를 한껏 실천하곤 했다.


여행 당시를 생각하면, 혼자서 떠나는 여행과 여럿이서 떠나는 여행은 콜라와 요구르트만큼이나 광활한 차이를 갖는 것 같다(이런 말은 한 12년쯤 홀로 여행을 다니고, 고독감의 절정을 통달한 후에 “으음, 혼자 하는 여행이란 말이죠.”하고 적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뭐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겠다는 마음으로 적고 본다). 목을 축일 수 있다는 사실은 똑같지만 맛, 식감, 목 넘김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들은 확고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여행도 이와 흡사하다. 여행이 어디 특별한 일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구입할 수 있는 음료처럼, 늘 곁에 있는 것이 여행이다.


여러 명과, 아니 꼭 대여섯처럼 많은 수가 아닌 단 한 명이라도. 누군가를 동반하는 여행은 대게 흥미 위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예컨대, 낮에는 맛집을 찾고, 밤이면 술을 먹는다. 유명한 관광지를 들르다가도, 감정이 짙어지는 밤이 되면 지는 듯이 술을 먹는다. 푸른 하늘이 나지막이 사라지고, 그 공백을 메꾸려 나타나는 부스스한 오후의 뒤척임. 마치 숙련된 화가의 채색처럼 중후한 선율을 마주하여, 자연의 경의로움과 우주의 신비,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추구가 나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밤이 되면(크흠, 알죠?), 그렇다. 결국 또 술을 먹고 마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건립된 할리우드의 흥행 공식처럼, 규격화된 하나의 여행 공식이다. 물론 흥미를 선두로  여행이 영양가가 없고 표피적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오래 뭉쳐있던 스트레스의 물리적인 해소와 본디 가깝던 우정이 더욱 밀접해지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는, 꽤나 합리적인 투자라고 생각한다. 여느 것에도 장점은 있다.  또한 여행이라는 테마를 하나로 두고 파생된, 수많은 형태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 혼자서 떠나는 여행은 뭐라고 해야 할까. 흐음, 글쎄요. 꼭 나도 모르게 깊숙한 내면을 건드리는 영화나 소설을 닮은 게 아닐까. 감상할 때는 의외로 단조로운 구성에 덤덤해지곤 한다.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짜증을 내는 일처럼. 여행의 진가는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나고야 만다. 털썩하고 드러누우며 “아아. 역시 집이 최고지.”하는 그 이후에 말이다.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아니 듬성듬성. 어쨌든 그런 일이다. 이 정도면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가히 멋들어진 일탈 아닌가.


특히 아름다운 밤바다를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어머, 또 일탈이 시작됐다).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끝없는 바다가 닿을 수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면 이토록 오래 머물 수 없다. 그 수평선은 어렴풋 다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았다. 외로운 사람들은 바다로 모여들고, 외롭지 않은 사람들도 바다로 모여든다. 근처에 있는 이들을 하나둘, 선상에 올리다 보면 수치 값은 결국 0이 되고야 말 것이다. 바다는 이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곳이다. 그 마음만큼 정말 질리도록 지켜봤다.


바다로 내려오는 길목에선 책을 읽었다. 여행지에 들릴 때면 뭐가 됐든, 책 한 권을 꼭 손에 쥔다. 다 읽고 읽지 않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리저리 오고 가는 중과 카페나 식당에서, 이들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리면 그곳에 얽힌 냄새와 기운이 고스란히 깃들게 된다. ―물론 비유지만. 오래 흐른 뒤에 그 책을 펼쳐볼 때면, 나를 여행 당시로 훌쩍 옮겨주는 초소형 타임머신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다. 일상에서 문득문득, 아니면 듬성듬성 작동하는 타임머신.


비진도로 들어가며, 손은 타임머신(책)을 쥐었지만 눈은 바다만을 바라봤다. 자칫하면 내 눈마저 푸르스름해질 것만 같은 투명한 바다였다. 섬은 두터운 뿔테 안경처럼 큰 두 개의 섬이 가느다란 브릿지를 통해서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이내 섬에 발을 딛자, 마치 다른 행성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바닷목에는 작은 암초가 있었는데, 이것이 마치 위성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섬은 해수욕이나, 피서를 목적으로 온 가족, 친구, 연인, 학우처럼 떼를 지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는 나를 포함한 몇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페도, 식당도 몇 없는 남해안의 작은 섬이었던 탓이다.


그 몇 없는 카페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바람에 동작하는 물결들과 섬을 훑어봤고, 배가 고파지자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식당 주인은 어떤 호기심도 없다는 듯, 음식만을 내주고 돌아갔다. 그에 화답하여 묵묵히 식사를 마친 나는 계산을 하며 슬그머니 물었다.

“요즘도 사람들 많이 와요?”

“아휴, 많이 오기는… 다 한철 장사예요. 한철 장사.”

“아아…”

“그냥 몇 달 벌고, 그걸로 또 몇 달 사는 거지.”


바람이 차가워지자 카페에 들어갔다. 바다를 정면에 둔 작은 카페였다. 나는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이런저런 사색을 늘어뜨렸다. 그것들이 실체화된다면 눈앞에 널찍이 펼쳐진 저 바다라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왜 혼자 섬에 들어왔을까? 혼자서 여행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그것은 여행이 마진이 많이 남는 한철 장사와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곤 스스로 대답했다. 길어봐야 ‘몇 박 며칠’이란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행을 통해, 우리는 한때 벌어놓은(그것도 흑자가 많이 남는) 감정과 기억들로 몇 개월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설적이게도, 혼자서 떠나는 여행은 여럿이 떠나는 여행보다 더욱더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온다. 28인치 쌤소나이트 캐리어 여덟, 아홉 개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날엔 다시 배낭을 챙기겠지요?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란, 한 시절을 보다 근사하게 연소시키는 일이다.


* 청마(靑馬) 유치환의 문학정신을 보존·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건립된 문학관.

**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앞에 비치된 백석의 시 ⌜통영2⌟가 적힌 시비(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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