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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May 07. 2020

홍상수식 에세이 쓰기

나만의 에세이 집필 방식

레이먼드 챈들러의 에세이를 읽었다. 평소에도 에세이 좋아하는 나지만,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발견하면 유별나게 손이 간다. 마치 어느 과자 광고의 CM송 같다. 순간 책과 나 사이에는 자력 비슷한 것이 생겨나는데,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이끌리듯 책을 집는다. 예컨대,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다가도 ‘오호 이 사람 에세이가 나왔군.’하면 발부터 멈칫한다. 그러면 나는 ‘아니야, 이럴 시간이 없다고.’하며 억센 유혹을 뿌리치며 가던 길을 가야지, 하다가도 ‘이래서 그 소설을 쓴 거였군!’하며 어느새 에세이를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소설가의 에세이가 재밌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입이 아닌 작가 본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고, 두 번째는 어떻게 그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나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시답잖은 글이나 툴툴거리는 영화학도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으레 관심이 간다. 더군다나 이 책은 챈들러가 실제로 쓴 편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스물일곱 배쯤 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세세히 그의 작업 방식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는데, 대강 이런 것이다. 1)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갖출 것. 2)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을 것. 3) 문장이 떠오르면 쓰고 떠오르지 않으면 쓰지 않을 것. 그러나 오직 글을 쓰는 행위 외에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것.


물론 챈들러만이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가진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스타일’을 차치하더라도, 저마다 독특한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헤밍웨이처럼 전쟁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하드보일드’ 형 작업 방식도 있는 것이고, 피카소처럼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는 ‘돈 조바니’ 형 작업 방식도 있는 것이다. 이런 수다한 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역시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우연한 계기로 유준상이 출연하는 『무릎팍도사』를 보게 됐을 때의 일이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그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홍상수 감독으로부터 섭외 제의가 들어오자 유준상은 그에게 제목과 내용에 대해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나도 모르지.” 한 마디(이는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가 됐다). 자신의 작품 이름과 내용을 모르는 감독이라니, 이 무슨 헤밍웨이가 십자수 뜨는 소리요, 피카소 출가(出家)하는 소리인가. 이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이야기는 입이 열릴수록 흥미를 더해갔다.

“감독님, 바닷가 촬영이면 텐트 가져갈까요?” 유준상이 물었다.

“텐트? 텐트 좋지.”

“그러면, 기타는 어떨까요?”

“오 그래. 기타도 좋겠다.”

아니, 그에게 구상이란 게 있기는 한가?


집으로 돌아온 유준상은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텐트와 기타. 그때 눈언저리를 살짝 낚아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랜턴.’이었다. 그는 가져갈까 말까를, 명품 지갑을 주운 사람처럼 고민했다. 부피도 별로 차지 안 하겠다 냅다 챙겼는데, 얼씨구. 이것이 장차 칸 영화제에서 언급이 될 만큼 중요한 메타포로 이용된 소품이 된 것이다.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설명은 각설하겠다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 세 가지 소품은 사건을 매듭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유준상이 없었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됐으려나?’하는 걱정 서린 마음과 함께, ‘으음, 역시 거장은 다르군.’하는 경외심마저 들게 됐다.


더불어 그는 촬영장에서의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감독의 지시대로라면, 유준상이 신명 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이에 이자벨 위페르 여사는 노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이런저런 딴짓을 해야 한다. 한데, 유준상이 흥얼거린 노래가 위페르 여사에게 좋았던 거 아닌가. 그녀는 그만 지시와는 다르게 칭찬 일색을 늘어놓는 연기로 흘러가게 되었는데, 홍상수 감독의 대답은 당황스러울 만큼 놀라웠다.


오케이! 이렇게 가자!


한두 마디의 애드리브도 아니고, 극의 전체를 흔들어 놓는 연기에 오케이를 외칠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될까. 내 얘기를 조금 덧붙이자면, 나는 겁이 많아 어떤 영화를 찍든, 강박적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과는 가히 양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다. 하나 이토록 기묘한 작업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딘지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다름 아닌 내가 에세이를 쓰는 방식과 대개 흡사했기 때문이다.


방식은 이렇다.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면도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연필을 깎으며, 으음… 이번 주는 또 뭘 써야 하려나, 하고 고민에 빠져든다.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없으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드는 수밖에 없다. 책장의 세 번째 칸, 왼쪽으로부터 일곱 번째로 꽂혀 있는 책의 72페이지를 펼쳐 들면, 그곳에는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던 나의 아이디어 소재들이 가득 채워져 있을 리는, 물론 만무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소재를 통해 받는 스트레스가 감소돼, 훗날 수명이 세 달쯤은 늘어날 텐데요.


그저 떠다니는 소재 하나를 붙들고 무작정 펜을 드는 것이다. 생각해둔 엔딩도, 전개 방식도 없다. 그렇다고 묵묵히 문장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그 어떤 것도 적어 내릴 수 없다.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상태에서 잡아둔 큰 틀 속을 묵묵히 연필로 채워나갈 뿐이다. 힘들게 단어들을 설득하여 빈 종이 위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악을 쓰며 한 줄 한 줄 적다 보면, 내가 진정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차츰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적어 두었던 단어들이 뒤에서 어떤 은유로써 편입되기도 하고(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결론에 치닫는 경우도 허다하다(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에 닿지 않고 끝나버리거나, 생뚱맞게 떠오른 결론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마치 유준상의 랜턴이나 위페르 여사의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엊그제 김중혁 작가의 에세이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역시 소설가의 에세이는 재밌다). ‘잘 쓰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쓸 수 있다.’ 김중혁 작가의 말은 이 긴 문장들을 요약하는 것 같다. 1) 쉽게 쉽게 적어 내리는 것. 2) 어떤 구조도 짜지 않는 것. ―부록으로― 3) 퇴고에 많은 힘을 쏟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그저 지극히 자유롭게 사고를 탐방할 뿐이다. 그러다가 묵묵히 마주하는 문장들을 손으로 옮겨 적는 것. 나는 이것을 ‘홍상수식 에세이 쓰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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