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의 첫 번째 하루
해당 글은 2020년 12월에 발매된 『엎어진 영화, 엎질러진 터키』의 일부 에피소드입니다. 전문은 제목에 연결된 링크를 통해 구입하여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8시간의 하루를 보낸 세 번째 날이었다.
9시간의 비행을 거쳐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레드 와인 한 잔과 화이트 와인 두 잔을 마신 나는 제법 몽롱했다.
그렇게 마치 하늘에 붕 뜬 듯한 기분으로(아, 나 하늘에 있지?)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느라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승무원은 기내식과 음료를 나눠주었다. 지친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입에 들이밀었는데, 매쉬 포테이토와 구운 소시지가 갓 제공된 크루아상과 어우러져 그런대로(베이징 소시지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괜찮은 맛이었다. 뭐, 나쁘지 않게 채워진 첫 단추다.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 신시가지 방면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크라인 유학생 아라밥을 만났다. 그녀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며 2년째 터키에 살고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같은 정거장에서 내렸다. 일출 직전의 깊고 고요한 어둠이 도시 전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와 사진을 한 장 찍고, 한국에서 가져온 동전을 선물로 건넸다. 마지막으로 페이스북 친구를 추가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아마 나는 그녀를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소식을 보고, 나도 그녀의 소식을 본다. 어쩌면 메시지를 보내거나 통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할 때보다 훨씬 많은 인연이 정보통신혁명을 통해 이어졌다.
그녀와 헤어진 것은 오전 6시 언저리였다. 출근 시간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다. 우리는 오픈 준비 중인 카페에서 퇴짜를 먹고, 길에서 산 시미트(가운데 구멍이 뚫린 터키의 국민 빵)를 우물거리며 24시간 케밥 가게에 들어가 차이(터키식 홍차)를 주문했다. 시리아 출신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프랜차이즈 케밥 가게였다. 프랜차이즈임에도 불구하고 차이와 이후 먹은 케밥이 몹시 훌륭했다. 밥을 먹는 내내 사장님은 우리 곁을 지키며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음식에 대해, 터키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그의 이름은 까먹었으나,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총장님을 닮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친절했던 총장님. 고맙습니다.
갈라타 타워 앞,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후 숙소에 들어갔다. 대충 짐을 던져둔 우리는 숙소를 빠져나와 볕이 그윽한 식당으로 향했다. 생선 요리와 에페스 맥주(터키의 대표 맥주)를 주문하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음식을 기다리며 주변을 바라본다. 이상하다. 물도, 사람도, 공기도,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터키의 시간은 한국보다 천천히 흐르는 것이 아닐까. 아니, 혹시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순간 ‘그렇지 않아.’라고 대답하듯, 순식간에 음식이 나왔다. 주방장의 거친 손길로 섬세히 구워낸 연어구이다. 흩날리듯 레몬을 뿌리고, 예리한 칼과 포크로 살점을 크게 잘라 입속으로 넣는다. 우리는 말 없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살점을 잘라 입으로 넣었다. 이렇게 흔한 표현을 쓰는 것은 미안하지만, 내가 살면서 먹어본 최고의 연어구이였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최고’라는 찬사가 붙는 음식은 예컨대, 이런 음식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묘사가 필요 없는 정말 ‘최고’의 연어구이였다. 우리 세 사람은 짧은 감탄을 한 번씩 내뱉고,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묵묵히 생선구이를 먹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은 오직 바다를 바라볼 때뿐. 정말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 시간을 보냈다. O는 그가 찍은 영화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고, 비행기에서 잠을 설쳤던 Y는 숙소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괜찮은 카페가 보이면 들어가, 차이를 시키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우리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O는 기념품을 잔뜩 사며 흥정을 배웠다. Y는 슈퍼마켓을 다녀오다가 사기꾼에게 90리라(한화 약 19,000원)를 빼앗기곤 경계심을 배웠다. 각자의 하루 속에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배웠다. 아 물론, 나도 배웠다.
‘이곳에서 동양인은 무조건 차이니즈.’라는 것을.
긴 하루다. 우습게도, 시간은 아홉 시밖에 되지 않았다. 일기를 정리하고 침대 일부가 되듯 쓰러진다. 터키의 시간은 정말로 천천히 흐르는가 보다.
남은 날은 11일, 2019년 2월 19일의 일이다.
* O가 찍은 단편영화 중 <홍대>라는 작품이 있다. Y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온종일 홍대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