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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기버 Feb 09. 2021

엄마, 저도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매일 밤 기도하는 5살 아들을 위한 부모의 계속된 도전

어느날 갑자기 5살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저도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응?"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왜 아파트에 살고 싶은데?" "유치원 친구들은 아파트에 산대요. 할머니 집도 아파트잖아요." "아, 그렇구나. 아파트가 왜 좋아?" "높은 곳에 살고 싶어요. 엘리베이터도 타고 싶구요." 빌라 생활을 싫어하거나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위치에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던 나에게 아들의 발언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갑자기 이사를 갈 수는 없으니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기도해보자." 그 날 이후로 아들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아파트에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진지하게 고민 했다. 2014년. 결혼할 당시만 해도 바로 뒤 입주하는 아파트에 미분양 물량이 있어서 저렴하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많은 대출을 일으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그저 열심히 모아서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아파트는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몇 억씩 올라버렸다. 부모인 우리는 빌라 생활이 조금 불편한 점은 있어도 만족하며 살았는데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유치원에서부터 다른 주거 환경으로 아이가 차이를 느끼는데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면 어떨까.




남편과 나는 액션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돈은 없지만 대출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먼저 도전한 것은 공공임대였다. 지인 가족이 강남에 공공임대로 좋은 아파트, 좋은 환경에 살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낯선 도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공임대의 벽은 높았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갈 생각을 하다 보니 초등학교가 먼 곳은 못 가겠고, 좋은 입지를 보면 경쟁률이 높고. 몇 번을 도전했지만 번번이 탈락. 또 탈락이었다.


다음으로 도전한 것은 신혼 타운이었다. 서울이 아니었지만 어디든 서울로 출퇴근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아파트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신혼 타운을 위해서 그전에 분양하는 모든 민간분양은 패스 했다. 오직 신혼 타운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 부부 머릿속에는 아마 행복 회로가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비싼 민간보다 신혼 타운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고, 우리는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결과를 보고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해당 지역 조건도 만족하지 못한 우리는 경쟁 상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무지했다.


또 다른 도전은 민간임대사업인 뉴스테이였다. 민간이 짓기에 이름도 멋지고 좋은 입지에 위치해 있었다. 아이들과 손잡고 모델하우스를 방문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한창 아파트들이 생기고 부모님 손을 잡고 모델하우스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당시에 분양 홍보를 위해 많은 선물을 주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모델하우스를 방문한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성인이 되어 방문한 모델하우스는 정말 신세계였다. 브랜드 네임이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뭐든지 좋아 보였다. 이들 사진도 찍어주고 영화 티켓을 주는 이벤트에도 당첨되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에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운은 거기서 다했나 보다. 보기 좋게 탈락. 잔뜩 기대한 아이에게 결과를 말해주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뉴스테이 모델하우스에서 찍어 준 아이들 사진

이후에도 아이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부모인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싼 아파트를 살 수 없으니 경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근대는 맘으로 처음 경매 물건지에 가보고, 부동산에 들어가 물어도 보고. 20년이 넘은 아파트였지만 리모델링하면 달라질 거라며 또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의 부정적인 답변에 한 풀 꺾이고 그렇게 흘러갔다.


다음엔 구축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주말에 아이들 손잡고 오래된 아파트를 보러 갔다. 아직도 기억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벚꽃이 회오리 치던 공원의 모습. 벚꽃놀이를 못 간 아쉬움을 아파트를 알아보러 간 동네에서 달래었다. 역시나. 우리 것이 아니었는지 매수하지 못하고 접었다.


그리고 민간 청약으로 눈을 돌렸다. 가점은 형편없이 낮았지만 남편의 이직과 나의 육아휴직으로 가까스로 신혼부부 특공 자격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여러 모델하우스를 다녔다. 아이들은 아파트 보러 간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했다. 팜플랫을 보기도 하고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걸 나들이로 여겼다. 고맙기도 하면서 안타깝기도 했다. 아파트에 사는 건 왜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일까 하고 아이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열심히 다닌 모델하우스

그러다 나의 옛 직장이 있었고 자취 생활을 하던,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던 곳에 분양 공고가 났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만났던 곳이라 소개하며 갔던 모델하우스는 우리 마음에 꼭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해져서인지 이번에는 꼭 당첨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여기 꼭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에게도 기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청약 결과가 발표 나는 날. 새벽 0시.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핸드폰을 켰다. 발표 날 0시에 결과가 난다는 건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다. 또 탈락일까 봐. 결과 확인을 위해 주민번호를 누르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눈을 감고 떴는데.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창이 떴다. 동과 호수가 보였다. 동과 호수가...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말이다. 떨리는 손으로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었다. 움직이는 남편을 더 세게 흔들고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남편은 갑자기 이불을 차고 일어나 앉아 핸드폰을 다시 보았다. "됐어?"




그날 새벽, 새 하루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했던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 날 이후에 우리는 여전히 30년 된 빌라에 살고 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새로운 꿈을 꾸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 꿈.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이 쉽지 않고 모든 것이 불투명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이 우리 가족에게 펼쳐졌다. 이 모든 것은 아이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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