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은 편지]#24
<엘리멘탈>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길이었습니다. 에어팟 프로(1세대)를 귀에 꽂고 OST를 들으니까 조금 전에 봤던 영화의 감명이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했어요. 집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곳은 양방향 8차선의 양재대로입니다. 길이 무척 넓어요.
귓구멍이 좀 간지러웠습니다. 누가 내 욕하나? 오른쪽 어깨에는 운동용 숄더백을 메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영화보며 마시던 콜라 500ml 패트를 들었어요. 왼손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에어팟 유닛을 살짝 들고 간지러웠던 부분을 가운데와 약손가락으로 슥슥 긁었습니다.
들고 있던 유닛을 귀에 다시 걸치려는데 그만 손가락에서 미끄러졌어요. '앗'스러웠지만 다행스럽게 왼쪽 팔굼치로 떨어졌죠. '오~ 다행다행', 콜라를 들고 있던 오른손으로 잡기 위해 약손과 새끼손가락으로 패트병 입구를 바꿔 잡으려고 했습니다. 도와줄 왼손없이 오른손만으로 하려니 어렵더라고요.
억지로 패트를 바꿔 잡으려는 순간, 왼쪽 팔굼치가 슬쩍 풀리며 유닛을 놓칠 거 같았습니다. '으악~ 떨어뜨리겠다' 싶자마자 땅바닥에 곤두박칠쳤어요. 조금이라도 파손되지 않게 하려고 발을 뻗었습니다. 운동화로 충격을 줄여보려고 했죠. 운동화 발등에 떨어졌지만 유닛은 튕겨져 나갔어요. 하필,
배수구 방향으로 말이죠. 데굴데굴 구르더니 하수구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 짧은 순간이 아까 봤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어요. 몇 초였을테지만, 몇 분처럼 '이게 뭐야?'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함께 그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어이없는 심경으로 빗물받이로 가서 밑을 봤어요. 에어팟 유닛이 보였습니다. 검붉은 토사 위에 유독 하얗게 반짝였어요. 의문은 깊은 빡침으로 '야이 xx 그걸 발로 왜 차', '그냥 떨어뜨리지' 나를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던 컨디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죠.
분노가 약간 걷히자 '어떡하지?', '그냥 잊어버린 셈치고 새로 살까?' 고민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프로 2세대를 사고 싶었는데, 갖고 있던 1세대가 별 이상없어 그냥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2세대 새거를 사자' 마음이 들었습니다.
돌아설까 했지만 창살 사이로 제 에어팟 유닛은 선명했어요. 이렇게 버리자니 아까웠습니다. 일단 빗물받이를 들어봤어요. 꿈쩍도 안하더군요. 다시 용을 써 들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더군요. 8차선의 많은 차들에서도 저를 보고 있을 거 같았습니다. '더러운 곳에서 뭐하는 거야?'
'제 에어팟이 떨어져서 꺼내려고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남의 시선을 스스로 느끼니 창피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에어팟을 두고 가자니 왠지 분했습니다. 누군가 저 유닛을 주워 사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배까지 아프더군요.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려 옆의 빗물받이를 들어봤습니다. 무겁기는 하지만 들렸어요. 옆으로 치웠는데 유닛까지 꽤 멀고 깊어서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길이가 긴 집게가 있으면 집을 수 있을거 같았는데, 길에 그런게 있을리 만무했죠.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뒤져 봤지만 역시 집을 만한 막대기는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바닥에 놔둔 코카콜라가 눈에 들어왔어요. 패트를 뻗어 닿는다면 긁어서 손이 닿는 곳까지 가져올 수 있을거 같았습니다. 남아 있던 콜라를 버렸어요.
열린 빗물받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뻗으니 간신히 닿았습니다. 토사들이 안묻도록 살살 긁었더니 꿈쩍않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힘주어 톡톡 치듯 긁으니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주우려고 했더니 한 끗 차이로 손이 닿지 않더라구요.
난감했습니다. 마침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 또 부끄럽더군요. 다시 일어나 그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어떡할지 고민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자 무릎꿇고 한 손으로는 닫혀있는 빗물받이를 짚고, 어깨와 머리까지 열린 빗물받이에 집어 넣어 팔을 뻗었더니 그제서야 집을 수 있었습니다.
토사물이 여기저기 묻었지만 에어팟을 구했어요. 휴지로 감싸고 가방에 넣은 채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하수도 빗물받이와 씨름하던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지 그땐 무척 낯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스스로 만든 그 시선은 자리를 벗어나자 금방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때를 생각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어팟을 하수도에 떨어진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왔다면, 더러운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게 부끄러워 그냥 왔다면, 창피했던 제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을거 같습니다. 아마 그 자리를 지날때마다 생각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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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작은 헤프닝임에도 그 짧은 시간에 마음이 어찌나 울그락 불그락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간만에 편지를 쓰네요. 부족하지만서도 하나의 글을 마무리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다시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랄까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감을 다시 느끼네요. 가슴에 쌓인 이야기들도 풀어보겠습니다. 비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