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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헤두안나 Feb 08. 2024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15화 느낌표 말고 쉽표 - 깊은 심심함

대학별 모집요강이 발표되었습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논술전형과 정시에서 선택과목 지정이 폐지되었습니다. 인문계 자연계 각각 사탐과 과탐으로 제한되어 있던 영역을 풀고, 사/과탐 포함하여 2과목 중 등급이 높은 과목을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아이는 생명과 지구과학을 사탐으로 바꾸어야 할지 고민합니다. 교육정책이 바뀔 때마다 가장 혼란을 겪는 것은 학생들입니다. 정책과 제도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당장 내 아이가 그 혼란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속상하고 안타깝네요. 지금까지 과탐 공부를 쭉 해왔으니 휘둘리지 말고 가기로 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외식 자리에서 아이가 속내를 털어 놓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받았던 수․과학 영재교육이 재미없고 힘들었다고 말이지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자신은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중2부터 고1까지 했던 포스텍 기업인 영재가 훨씬 매력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은 말 그대로 기업인 영재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이공계뿐만 아니라 기업인이 갖추어야 할 기획과 관리, 리더십을 함양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 시기 아이는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제약이 있었지만 캠프와 교육을 받을 때면 하루 종일 몰입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경영학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취업이 어려운 문과보다 일단 이공계로 진학을 하고, 복수전공을 하는 방향으로 설득했지요. 경영학을 전공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언니를 봐서 그럴까요?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고민이 됩니다. 


적성에 맞지 않은 과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나 휴학을 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아이가 행복한 대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선택이 과연 잘한 결정인지 염려스럽습니다. 특히 문 ․ 이과 구분 없이 지원이 가능하게 된 시점에서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오늘은 작은 딸아이의 열아홉 살 생일입니다. 19개의 초를 꽂고 가족이 모두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년 이맘때쯤 더 행복하게 생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말이지요. 친구들과 서울 나들이를 한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맘껏 풀고 다시 달릴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월이 시작된 후 큰딸아이는 많이 불안해합니다. 본인이 세운 학습 계획에 맞추어 열심히 하고 있는 듯한데, 예민해져 있습니다. 시험일정이 다가오면서 병행하던 체력 훈련 일정을 조정하고 필기시험에 올인 하고 있습니다. 막판 스퍼트를 내야 하지만 큰딸아이에게 조금 쉼이 필요한 듯합니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둘이 스터디 까페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녀석들입니다. 




온라인으로 하는 작은 독서모임이 있습니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만난 지인들로 모두 상담이나 각계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들이지요. 선정한 책을 읽고, 격주 토요일 아침 7시에 만나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지난주 참석을 못했네요.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읽어내야 할 분량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세운 계획을 못했다는 생각에 참석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휴일 내내 기분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방학이 한 달도 남지 않아서일까요? 더 조급해집니다. 플래너에 기록된 일과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분명 내가 원하고 좋아서 하는 일인데,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어 강박을 일으킵니다. 일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다보니 수면도 불규칙합니다. 조금씩 피폐해져 가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 운동을 통 하지 못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남편에게 등 떠밀려 무려 5km거리를 걸었습니다. 남편이 조금 쉬어 갈 것을 권합니다. 옆에서 보기 안타깝고 위태로워 보인다고 합니다.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낫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건강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느낌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쉼표의 시간이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 명절 연휴에는 쉼표의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분주히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미리 역할을 하고 왔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막내 동생네와 함께 방콕으로 여행을 가십니다. 코앞에 닥친 큰딸아이의 시험일정으로 인해 같이 가자는 동생의 권유를 다음으로 기약했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신 친정에 갈 이유가 없어졌네요. 

남편의 말대로 현재 저는 느낌표로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더 나은 느낌표를 찾아 스스로 담금질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깊은 심심함’일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심심함’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개념입니다. 그는 깊은 심심함이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강조하면서,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이며 창조적 정신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하는 단순한 분주함은 결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뉴욕에 있는 독서 모임 친구가 참석하지 못한 저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앞으로 오래오래 책읽기 모임을 이어가자고 합니다. 앞으로 반세기를 더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옆에서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읽고, 쓰고, 가르치면서 그렇게 말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3박 4일 연휴 동안, 느낌표 말고 쉼표의 시간으로 온전히 ‘깊은 심심함’을 경험해 보려 합니다. 멍 때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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