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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헤두안나 Jan 30. 2024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14화. 비움의 시간 - 범불안장애

작은 아이는 수학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MZ세대들의 새로운 문화일까요? 과외를 까페에서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생활 침해 때문이라고 합니다. 큰 아이 때만하더라도 학습지나 과외 선생님의 방문이 있는 날이면 청소며, 간식이며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까페에서 과연 수업이 제대로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외향적인 아이는 답답한 공간보다 오히려 더 잘된다고 합니다. 효과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문화가 그렇다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전 시청역 근처, 모 프렌차이즈 까페는 그런 학생들을 위해 24시간 오픈합니다. 학원가가 많은 만큼 카공족을 겨냥한 맞춤식 까페라고 할 수 있지요. 민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합니다. 


저만 하더라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까페를 이용합니다. 특히 초고를 완성한 후 좀 더 세부적인 첨삭이 필요한 경우, 까페는 유용한 공간입니다. 어수선한 소음을 익숙한 클래식 음악으로 차단하고, 집중하다 보면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있습니다. 지금 이 글도 그렇게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긴 시간을 앉아 있는 것은 민폐이긴 하지요. 그래서 되도록 넓은 프렌차이즈 까페를 이용합니다. 그래야 덜 미안하니까요. 조금 이기적이 됩니다. 이제는  까페 사장님도 알바생도 반갑게 맞아 줍니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나쁘지 않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첫 날, 간단하게 끝날 것을 예상하고 갔는데 무려 2시간 30분 동안 수업을 했다고 하네요. 열정적인 선생님 덕분에 아이도 공부에 더욱 의지를 불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아이는 토요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방을 정리했습니다. 곧 있을 도배 공사를 앞두고 쌓아놓았던 책과 옷가지 등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물 같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때 받았던 생활기록부, 상장,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등. 심지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전공서적과 입지 못할(?) 옷가지들을 버리고 나니 방이 훤합니다. 


최고의 정리는 버리는 겁니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물건이 많아 답답해 보였습니다. 비운 후의 공간은 정말 깨끗해졌습니다. 저는 옆에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거들면 이래저래 추억이 생각나 버리지 못하게 할 것이 뻔했지요. 깨끗해진 방을 보고 많이 후련한 모양입니다. 


정리가 끝난 후 살짝 몸살을 앓네요. 비염으로 먼지에 취약한 아이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  먼지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비워내는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었겠지요. 다시 채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인도 아마 그러기 위해 조금 무리한 것 같습니다.   


저는 임용 발표가 났습니다. 무려 한 달 동안의 긴 기다림 끝, 낭보입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임에도 영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계약직의 서러움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엄마를 통해 학습한 아이가 안정적인 공무원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함께 지원한 교수 중 누군가는 임용에 실패하여 졸지에 강단에 서지 못했습니다. 결코 남 일이 아닙니다. 논문편수나 강의업적 등의 기본적인 역량도 갖추어야 하지만 운도 작용해야 합니다. 


점점 좁아지는 문, 줄어드는 학령인구로 인해 대학은 꾸준히 구조조정을 해왔고,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거기에서 가장 일 순위 대상은 바로 강사들입니다. 때로는 불합리하다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막상 이곳을 떠나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자부하기에는 상황이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떠나 새로운 역량을 발휘하고 사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불안한 마음은 끊임없이 자기착취로 내몰립니다.


불안 증상은 방학이 되면 심해집니다. 혹자는 방학이 있는 직업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에너지가 내부로 향해 있기 때문에 사실 방학이면 저도 행복합니다. 학기 중에 전심을 다해 에너지를 쓰고, 방학동안 혼자 책 읽고 글 쓰고 하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두 달이라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삽니다. 그 안에 성과를 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또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중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많은 불안(anxiety)을 경험합니다. 불안은 모든 심리장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공황장애, 강박장애, 사회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은 불안을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범불안장애(GAD)는 다른 이상심리에 비해 최근에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 증상입니다. 


범불안장애는 미래에 대해 걱정과 불길한 기대로 인해 나타납니다. 대상이나 상황이 특정되지 않은 모호하고 막연한 상태의 불안을 의미합니다. 안절부절못하고 쉽게 피곤해지며 주의집중이 어렵고 근육이 긴장되며 수면에도 곤란을 겪기도 합니다. 이 장애는 항상 걱정에 시달리는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웰스(Wells)는 범불안장애의 인지 모델을 1유형 걱정과 2유형 걱정으로 구분합니다. 1유형 걱정이 실제 외부 사건과 내부 사건에 대한 걱정이라면, 2유형 걱정은 걱정 그 자체에 대한 걱정으로 걱정이 발생할 것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걱정 이라는 언어에 매몰되어 이상한 것이고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걱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미래 문제에 대한 대처를 도와주기도 하고 나쁜 일을 방지하는 데 준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오히려 걱정이 없는 것이 발전적인 측면에서 보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걱정이 더 심하게, 지속적으로 사고를 침투해서 불안을 야기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올해는 어찌해서 되었지만, 내년에는?’ 발표가 난 후 제 머릿속에 떠오른 걱정입니다. 일 년 후 일어날 일을 걱정하느라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현재 저에게는 그 누구보다 건강한 걱정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1월도 끝납니다. 아직 2월 한 달이 남았습니다. 짧은 달이어서 그리고 이래저래 행사가 많아 더 분주한 달이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 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 순간 결과물이 나오겠지요. 그것이 논문이든, 계획서든, 글이든 말이지요. 오늘도 저는 쉬지 못하고 저를 착취합니다. 


이제는 걱정과 불안에서 조금 벗어나려 합니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모험을 하고, 성취를 해내며, 만족감을 느끼고 자기실현을 합니다. 과거에는 무작정 읽고 썼다면 이제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습니다. 관련된 책을 읽고, 주제를 정해 글을 쓰고, 읽어주는 독자가 있고, 이렇게 하루하루 마음을 치유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가려 합니다. 


저에게도 딸아이처럼 비움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에 설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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