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베이스캠프 - OK이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퇴임하신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번개모임을 위해 내려오시면서 잠깐 만날 수 있냐고 문자를 주셨습니다. 당연히 시간을 내야 했습니다. 조금 일찍 서둘러 까페에서 글을 쓰면서 교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을 도와드리고 커피숍에서 두 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습니다.
투병 중이신 사모님을 케어 하시고, 연구와 책 쓰기에도 여념이 없으신 노년의 교수님을 뵈면서 저는 또 에너지를 얻습니다. 매 순간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재직 중이실 때는 학생과 학교 일에 진심이셨고, 지금은 사모님에게 그리고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조금이라도 젊은 저에게 자극을 받아 가셔야 하는데 오히려 항상 제가 도움을 받습니다. 오늘도 힘들지만 잘 가고 있다는 말씀에 힘을 내어 봅니다. 지혜롭게 사시는 어른이 멘토라는 것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니 좀 불편하고 힘든 인간관계는 회피하게 되더군요. 현재 주변에 있는 지인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데, 과연 나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너무 분주한 삶을 펼쳐놓고 그 중 한 가지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봅니다.
조용한 설 명절과 연휴를 보냈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오로지 우리 가족끼리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전과 음식을 장만해 시댁 선산과 친정아버지를 모신 공원묘지에 다녀왔습니다. 시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얼굴도 모르지만 그동안 본가에 살면서 매년 제사를 모시고 성묘를 다녀온지라 그냥 지나기 아쉬웠습니다. 또 여행가신 친정어머니를 대신해 조촐한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무언가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러 갑니다. 살아생전 남에게 해코지 한 적 없는 삶을 사셨으니 분명 우리를 지켜주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올해도 아버지에게 부탁만 드리고 왔습니다. 큰손녀의 취업 성공과, 작은 손녀의 대학 입학을 기원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당신이 좋아하시던 호박전을 정성껏 만들어 올렸습니다. 여행 가기 전 어머니와 막내 동생이 갈아 드린 꽃이 화사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모습처럼…….아버지가 보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연구재단 계획서를 구상했습니다. 작년에는 운 좋게 선정이 되었지만, 올 해는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산이 무려 40%나 삭감 되었습니다. 더 창의적이어야 하고, 더 탄탄한 계획서를 써야 합니다. 기획한 구상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습니다. 올해는 일정도 앞당겨져 5월 중 발표가 납니다. 개강 전까지 다른 글쓰기를 잠시 접고 이 일에 올인 해야 할 듯합니다. 또다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립니다.
큰 아이는 응시 지원서를 썼습니다. 채용 인원에 변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여경 인원을 2명 ~4명 정도 선발하던 대전청이 무려 13명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동안 서울청과 경기남부청을 고집했던 이유는 인원이 가장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커트라인 점수가 매우 높은 두 곳이기도 합니다. 고민이 더욱 깊어집니다.
서울청을 고집하던 아이는 막판에 대전으로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좋은 결정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원이 늘어난 만큼 충남이나 충북으로 분산된 인원이 몰리면 분명 경쟁률은 높아지겠지요. 일단 주사위는 던져 졌습니다. 좋은 결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노력하는 일뿐입니다. 아이의 전략은 고득점을 맞아 필기 합격선 안에 드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는 고 3 반 배정을 받았습니다. 친한 친구들과 떨어져서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할 것 같다고 투덜댑니다. 이제 정말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사촌 언니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접하고 마냥 부러워합니다. 물론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선뜻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인내를 지불해야 하고 노력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1957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에릭 번(Eric Berne)은 교류분석( TA Transactional Analysis)을 창안합니다. 교류분석은 ‘성격이론인 동시에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촉진하는 체계적인 심리치료’이론입니다. 교류분석의 인간관은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타인과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고 그 결정은 바꿀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가정은 인간은 누구나 OK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힘든 과정이지만, 잘 견뎌내고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연휴 ‘깊은 심심함’을 위해 멍 때리기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네요. 글쓰기만 하지 않았을 뿐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in-put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은 공지영의 자전소설 《즐거운 나의 집》의 내용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 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
우리 집에는 인삼보다, 산삼보다도 귀하다는 고 삼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임용시험으로 초긴장 상태인 취준생도 있습니다.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지고 갈 짐을 대신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힘들 때 쉴 수 있는 튼튼한 베이스캠프를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고군분투합니다. 오늘도 소박하지만 예쁜 아침을 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