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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헤두안나 Feb 24. 2024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17화  식구食口 - 습관의 자동화

본격적으로 개강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수업계획서를 입력했고, 학생들의 수강신청도 완료되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묘한 긴장도 동반됩니다. 이번 학기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방학이 정말 빠르게 지났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변수들이 저의 시간을 천천히 흐르도록 도와주겠지요.  


현재 제 뇌의 반은 ‘2024년 연구재단 사업 계획서’ 작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계획했던 교육청 사업이 미선정되면서 연구대상자를 다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틀어진 계획서를 붙잡고 하루 종일 씨름하고 있습니다. 논문 문체로 전환하기 위해서 계획서가 완성될 때까지는 포스팅을 조금 미루기로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글쓰기가 저를 유혹합니다. 결국 이렇게 또 글을 쓰기 위해 카페에 와 있습니다.




《더 마인드》저자의 유튜브 영상을 보던 중 습관 형성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뇌에서는 습관이 자리 잡는데 3단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1단계는 전전두엽, 선조체, 중뇌가 활성화되면서 ‘낯선 경험’을 의식적으로 학습하는 단계입니다. 2단계에서는 습관의 모형이 서서히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선조체, 감각운동피질, 중뇌의 연결망이 생기면서 ‘행동의 자동화’가 일어납니다.


3단계에서는 ‘습관이 각인’되는 단계입니다. 선조체, 변연계 아래 피질, 중뇌가 활성화되면서 도파민이 분비되고 이로 인해 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때 뇌에서는 특정 회로를 만들어 ‘습관의 자동화’가 이루어집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필리파 랠리 교수가 런던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습관이 형성되는데 66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작년 4월, 블로그를 시작하고 브런치로 확장하면서 일주일에 2편 이상의 글을 포스팅했습니다. 저에게 이제 글 쓰는 일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뇌에서 자동화된 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 쓰는 일은 저에게 가장 강력한 도파민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남편과 아이가 나가고 커피와 사과 반쪽을 준비해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세미나 준비와 연구계획서 쓰기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확히 아침 9:06 분이었습니다. 한 주를 평화롭게 시작하려는 저의 의도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한두 번 하다 말겠지. 그러나 소음은 무려 한 시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살면서 되도록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물론 타인으로부터 받는 불합리한 피해 역시 참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누수와 층간소음으로 감정이 악화된 이웃을 위층으로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은 정말 큰 불행입니다. 아마도 누수 원인을 찾기 위해 뚫어 놓은 바닥 마무리 공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공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측하지 못한 소음에 고스란히 노출될 아래층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 경우 없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지 분노가 치솟습니다.


위층 남자는 그동안 만난 사람 중에 최악입니다. 남편이 잘 이야기했다고 했지만, 위층 남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미술학원 원장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또 그의 피셜처럼 교육자(?)라면 공감능력과 배려 없이 가능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절대적 이기주의를 보이는 그들이 결코 용서되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전을 몽땅 날렸습니다. 월요일 시작을 이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방법은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미장원에 갔습니다. 개강 전 해야 할 일이기는 했으나 계획에 없던 일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긴 머리로 스타일을 바꾸어 보려는 생각을 접고 다시 짧게 깎았습니다. 다행히 거울 속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다음날, 세미나를 위해 학교로 향했습니다. 고전 문학과 미술사 전공 교수들과 함께 공동 집필을 계획하고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그중 한 교수가 남편이 만들어 줬다면서 마리네이드를 푸짐하게 싸왔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봅니다. 솜씨 좋은 남편님의 마리네이드로 인해 우리는 행복한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가는 길에 소금빵과 모닝빵을 사고, 또 한 교수는 성심당 샌드위치를 사 오고 커피까지 장착하니 더욱 푸짐해졌습니다.


신나게 발제하고, 원고 점검하고 시간이 훌쩍 흐릅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이들과의 만남이 어제의 무례함을 보상받는 듯합니다. 기분이 충만해지고 위로받은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좋은 에너지로 연결이 되고 이 기세를 몰아 이번 주 열심히 달려볼 생각입니다.


큰 아이는 마지막 점검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수험번호가 앞부분이라고 당황하던 아이는 오히려 기다리지 않고 체력도 면접도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바꿉니다. 다행입니다. 이 긍정적인 마음을 시험이 끝나고도 유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작은 아이는 이제 서서히 관리형 독서실을 마무리합니다. 다음 주에는 개학 준비를 하고, 방학 동안 했던 공부를 다시 점검하면서 열심입니다. 아이는 저와 함께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다음 주 공백 기간에는 아이와 카공족이 되어야 할 듯합니다.



방학 동안 소원했던 남편과 데이트를 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지금 상황이 조금 답답할 수 있으나, 남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변을 보면 가족들의 무심함으로 외로워하는 가장들이 많다면서 말이지요. 딸들이 아빠를 친구처럼 대해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술을 조금만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큰 딸아이도, 무심한 듯 한방이 있는 작은 딸의 애교도. 매일매일 작은 감동을 받는 남편입니다. 남편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온 듯합니다. 딸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오늘은 닭볶음탕을 했습니다. 조금씩 늘고 있는 엄마의 요리(자칭)를 칭찬하며 맛있게 먹어줍니다. 아빠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음꽃이 피기도 합니다.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지려 합니다. 오늘도 각자 힘든 하루였지만, 노곤함을 식탁에 앉아 해소합니다. 식구食口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저는 소설을 구상해 봅니다. 위층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를 사이코패스로 설정할 예정입니다. 우습지만 소소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괜찮습니다. 소설은 말 그대로 픽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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