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노래방 -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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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화단에 연산홍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일러도 너무 이른 개화였을까요? 한파에 그대로 얼어버렸습니다. 제 시절을 알지 못하고 피어난 꽃잎이 너무 처연해서, 한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공부하는 패턴을 조금 바꾼 듯합니다. 새벽에 늦게까지 공부하던 방식에서 조금 일찍 자고,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조금 불안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은 제가 볼 수 없으니, 12시면 불이 꺼지는 아이의 방을 보면서 걱정스럽더군요. 다행히 성적이 조금 올랐습니다. 역시 충분한 수면이 집중력에 더 도움이 된 듯합니다.
저는 종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박한 경험을 했네요. 종강 날까지 학생들을 괴롭힌 교수가 잘못인걸까요? 발표를 맡은 조가 전혀 준비를 해오지 않았습니다. 10여년 강단 생활 중 처음 겪는 일이어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대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면서 제외하는 1순위 과목은 조별활동이 있는 수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업은 조별 수업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별활동을 통해 협동능력과 리더십 그리고 배려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체감은 다른 듯합니다. 여전히 무임승차 하는 학생들은 존재하고. 그 과정에서 조장이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학생이 힘들어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조별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심리학과 문학을 접목한 이 전공수업이 상중하 중에 어디에 해당 하느냐구요. 대부분 의 학생들이 상에 속한다고 하더군요.
어떤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몰입(flow) 혹은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이 필요합니다. 칙센트 미하이(1997)에 의하면 과제 수준이 높은 것에 비해 자신의 능력이 낮으면 무관심해 버린다고 합니다. 반면에 과제 수준도 높고 그에 맞게 본인의 능력도 높으면 최적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발표 준비를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어려운 수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자로서 반성합니다. 너무 높은 과제를 준 것은 아닌지? 너무 어렵게 가르친 것은 아닌지? 가장 좋은 교육은 눈높이 교육이라고 했는데, 이번 학기는 그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 같아 반성합니다.
아이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습니다. 집 앞 삼겹살 집 젊은 사장님이 우리 가족을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줍니다. 서로 술잔을 기울이면서(미성년자인 작은 딸은 사이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습니다. 항상 결론은 엄마 아빠를 향한 딸들의 잔소리로 끝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 여세를 몰아 상가에 있는 노래방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가수 뺨 칠 정도(?)로 노래를 잘 부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때 나름대로 노래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노래대회에 나가 일등을 했고, 남편은 젊은 시절 락을 한다며 허세를 부린 경험이 있지요. 그런데 이제는 딸들의 노래를 듣는 모드로 바뀌었네요.
노래도 기술인데 부르지 않으니 실력이 퇴보하고 말았네요. 음정도 박자도 다 엉망입니다. 결국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고 마이크는 다시 딸들에게 넘어갑니다.
아이들의 선곡은 엄마 아빠를 배려한 7080 노래입니다. 아이들이 불러주는 우리 시대의 감성은 대박입니다. 아빠차를 타면 늘 듣던 노래를 선곡해서 불러주네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돕니다. 요즘 제가 다시 F형으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네요. 그 눈물이 일상의 소중함에서 온다는 것에 그저 감사합니다.
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각자의 길을 찾아 가고 나면 부부만이 남게 되겠지요. 또 당연히 그래야 하구요. 그때가 되면 이 시간이 많이 그리워 질 것 같습니다.
아차! 우울한 생각은 하지 않으렵니다. 지금 행복한데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참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 때는 또 그날들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있겠지요.
엄마 아빠를 위해서 희생(?) 하는 아이들이 오늘 더욱 예뻐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