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을 통해 보는 타이베이
대만. 한국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지금까지 방문할 일이 없었는데 올해 좋은 기회와 타이밍으로 (여름보다는) 선선하다는 11월에 대만을 다녀왔다.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지 상상이 안될 정도로 11월 대만의 한 낮 기온은 30도까지 올라가며 두피를 뜨겁게 했는데... 오늘은 이런 열기에 맞먹을 정도로 뜨거운 변화를 보이고 있는 타이베이를 문화예술을 통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항상 다른 나라에 갈 때면 미술관이나 문화시설을 꼭 둘러보는 편인데 이번 대만 일정에는 '타이베이 시립미술관(Taipei Fine Arts Museum)'과 '타이베이 당대예술관(MoCA Taipei)' 그리고 '송산 문화창의공원(Songshan Cultural and Creative Park)'을 다녀왔다. 대만은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아시아 국가 중 하나인데 그 사례 중 하나로 2019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타이베이 당다이 아트페어(Taipei Dangdai)'를 떠올릴 수 있다.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전반의 문화 산물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는 ’타이베이 당다이 아트페어‘는 아트 홍콩과 아트바젤 홍콩을 성공적으로 이끈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가 총괄하고 스위스 글로벌 금융기업이자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Art Basel)의 공식 파트너 UBS가 후원사로 알려지며 홍콩을 대신할 아시아 미술 시장으로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전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온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 2022년부터 시작된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의 열기 그리고 아트바젤 홍콩의 정상화 등으로 아직 아시아 미술시장의 완벽한 왕좌는 가려지지 않은 듯하다. 다만 팬데믹 시기에 꽁꽁 얼어있었던 중국시장, 유동성 자금의 증가, 그리고 아시아 아트허브로 군림했던 홍콩의 중국화 정책 덕분에 제1회 프리즈 서울은 꽤나 순조로운 첫 시작을 했고, 2023년 현재도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에 비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아시아 시장에서의 경쟁은 프리즈가 아트바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3월에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과 9월에 개최하는 프리즈서울은 시기적으로 맞물리지 않아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 그리고 아직 홍콩이 여전히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이기에 홍콩-서울이 아시아 미술시장의 양축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는 <2022년 미술시장분석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엔저와 홍콩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서울이 아시아 미술 시장 가운데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고 표현했는데, 여러 경쟁 상황 속에서도 서울이 아시아 아트허브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대한 낙관적인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참고자료) 하지만 동시에 막대한 자본력에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미술시장 또한 간과할 수 없기에 앞으로 아시아 미술시장의 지각변동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적으로 한국이 중국을 앞서 나가는 것은 근시일 내에 힘들 것으로 보이기에 중국 자본이 아시아의 어디로 흘러갈지 추측해 보는 재미도 이 지각변동에 일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타이베이 당다이 아트페어'는 당다이(當代, 컨템퍼러리)라는 말 그래도 현대미술을 다루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아시아 현대 미술시장의 잠재성과 동시에 아시아의 금융허브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현대화된 도시 타이베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아트페어의 공식 후원사 UBS를 통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UBS는 유럽의 다국적 금융그룹으로, 이 기업이 아트바젤을 후원하는 것은 미술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금융사가 예술분야를 후원하는 것에는 대외적으로 예술 후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케팅 이미지 및 사회적 기여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을 텐데, 예를 들어 미술품 콜렉터가 은행의 VIP 고객이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접점 또는 예술품이 고(高) 가치 자산이기 때문에 금융상품(대체투자자산)의 일환으로 고려할 수 있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내용들을 취합해 생각해 본다면, 대만은 세계적인 금융사가 주목하고 있을 정도로 ‘현대화되고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잠재성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자, 그렇다면 현대화되고 있는 ‘문화의 도시 타이베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짧은 대만 여행을 통해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공간으로 '송산 문화창의공원(松山文創園區)'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송산 문화 창의공간'은 1937년 일본 정부 산하 대만 총독부 독점국 산하 마쓰야마(松山의 일본식 발음) 담배 공장으로 건립된 곳이다. 당시 이곳은 대만산업 건축물의 상징이자 전문화된 담배 공장이었으나, 1945년 대만이 중화민국에 반환되자 대만담배주류전매국 송산공장(Taiwanese Provincial Tobacco and Alcohol Monopoly Bureau Songshan Plant)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1987년에는 210억 대만달러에 달하는 최고 생산량을 기록했으나, 이를 끝으로 1998년 공장은 생산 중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2001년 타이베이시 정부는 이 공장부대를 타이베이의 99번째 문화유산지구(市定古蹟)로 지정해 ‘송산문창원구’로 명명하였고, 2011년 타이베이시 문화국은 이 공간의 보다 효과적인 재활용을 위해 공간 리노베이션을 실행해 대중에게 개방했다. 현재는 타이베이 문화재단(Taipei Culture Foundation)과 타이베이 뉴호라이즌(Taipei New Horizon), 그리고 대만디자인센터 등 세 개의 기관이 운영하며 대만창조허브로서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는 문화시설로서 자리매김했다. (참고자료)
'송산 문화창의공간'을 둘러보다 보면 문화기반 창조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대만 정부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업사이클링 프로젝트가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타이베이는 아직 외관상으로는 구시대적 혹은 근대적인 잔상이 많은데, 이런 외관 뒤에 숨어있는 도시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현대적인 방향성을 내포하며 일관성 있는 발전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딘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근대 건축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니 어쩐지 독창적이고 전통적인 도시 예술로 읽혔기 때문일까? 대만의 문화예술 공간들을 둘러보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양파 같은 매력이 있는 대만이랄까..! 한참을 대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대만의 매력이라고 이야기하면 좋을 두 가지가 떠올랐다 - 첫째, 대만이 창조경제를 강조하며 중소기업에 강한 나라라는 것 그리고 둘째, 역사문화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도시재생을 추진 중이라는 점이다.
위의 생각을 전개해 본다면 가장 먼저 ‘중소기업에 강한 나라’라는 성향은 대만의 역사를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거 1624년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인 펑후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 상인과 명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펑후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대만섬 서남부(현재 타이난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데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이 당시 스페인 세력도 대만섬에 진출하며 네덜란드와 알력다툼을 하기도 했는데, 네덜란드는 이런 경쟁에도 불구하고 대만섬을 점령해 중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 우세를 선점하는 것은 물론 대만을 거점으로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고자 했다고 한다. 과대 해석일지 모르지만, 대만은 아주 오랜 시간 지형적 그리고 지리적 특성을 '상업'이라는 키워드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뿐이 없는 역사를 품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상업성의 저력이 오늘날의 창조경제를 지지하고 중소기업에 강한 나라 대만을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2022년 말 기준으로 대만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대한민국과 일본을 앞질렀다고 한다.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대만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인데, 그 중심에는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있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비교했을 때 대만이 보여주는 창조경제 및 중소기업의 강세는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본받아야 할 대만의 매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참고자료 : 국가미래연구원)
다음으로, 대만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보여준다. 1996년 대만은 ‘타이베이시 커뮤니티 계획가 제도’를 신설•‘마을 만들기’를 끌고 갈 젊은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청년커뮤니티 계획가 훈련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구시가지의 역사적 근대건축물인 인안 의원(仁安醫院)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타이베이시 커뮤니티정비센터를 입주시켜 주민과 가까이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멀리서 보아서 낙관적인 면모만을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만의 이러한 정책적 발전은 종합적이고 일관적인 방향으로 계획되고 진화 중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의 자산을 재활용함으로써 지역의 역사를 보존함과 동시에 정체성을 살려나가는 발전 방향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아주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독창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지형적 문맥을 잘 읽어내고 그 가치를 지키고자 할 때 드러난다는 이타미 준의 말이 다시 한번 뇌리에 스치는 순간이다.
대만의 매력을 떠올리며 되돌아본 타이베이, 독창적인 문화와 창의성을 육성하는 경제 발전을 자신만의 속도로 이루어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도 산업 경쟁력을 발전•유지하기 위해서 문화산업의 동시다발적인 발전이 필수인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개방적인 정부정책과 합리적인 규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 모델로 성과를 내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우에도 문화산업의 성장이 주요 과제로 남아있듯이 말이다. 각자의 숙제가 다 다른 모습이겠지만, 문화예술을 통해 바라본 타이베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 중이기에 주변국들에 좋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매력을 알 수 있었던 대만, 이 포스팅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