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를 새롭게 해석 중인 한국 (2)
지난 편에서 보았듯, 요즘 들어 크고 작게 도시 재생 프로젝트나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라는 명목하의 사업들이 많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글로우서울'이 이런 사업의 라이징 스타라고 한다면, 광장시장 '박가네 빈대떡'이 만든 그로서리 스토어 '321 플랫폼' 또한 고유한 스토리를 통해 지역 상권의 가치를 재창조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확실히 과거보다 획일적이지 않은 각자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진행되는 상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개인들과 프로젝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일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고로, 이 모인 집단이 보여주는 정체성이 바로 우리네 문화인일 텐데, 요즘 들어 지역 상권에 가치를 두고 추진되는 일이 범람하다 보니 사회의 다채로움을 넘어 변화의 파동 한가운데 있는 듯한 불안정한 인상도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의 파동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시시각각 변화하고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오늘날의 문화를 두고 일각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차치하고 새로운 것에 현안이 된 MZ세대의 근본 없는 행동이라고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이 현상을 바로 보면 어떨까 제안해보고 싶다.
우리 이야기를 이어나가기에 앞서, 프랑스 문화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벨에포크(La Belle Époque)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고 한다. '벨에포크'는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과 함께 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때는 우리가 흔히 아는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거투르트 스타인(Gertrude Stein) 등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리에 모여들었고, 새로운 변화의 바람에 대해 모두가 갑론을박을 했고, 문화를 꽃피웠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황금기이다. 이 시절을 동경해 만들어진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만 보더라도, 이 문화적 번성함에 대한 찬양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의 주인공 길(Gil)은 벨에포크 시절의 낭만을 동경하는 인물로, 파리를 배회하다가 12시에 홀연히 나타난 클래식 푸조에 올라타는 것을 계기로, 1920년대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설정이다. 우상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그렇다면 주인공 길(Gil)을 포함해 후대가 동경의 시선으로 이 황금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그 시기를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벨에포크(La Belle Époque : 좋은 시절)'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벨에포크’는 1930년대 전쟁 전의 15년간을 일컫기 위해 "아 좋은 시절!(ah la Belle Époque!)"이라고 표현했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유래했고, 꿈같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대인들은 대외적으로 급성장하던 파리 금융가와 제2차 산업 혁명의 물결로 인한 변화에 허덕이며 지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변화의 역동성이 문화의 생명력을 가진 ‘아, 좋은 시절’이었다는 것은 철저히 후대의 생각과 평가이었으니 말이다.
파리의 벨에포크를 이해하고 한국을 다시 바라보니, 비록 지금의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새롭게 문화를정의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 오늘날이 파리 벨에포크 시대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작은 변화를 끊임없이 도모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문화적 번성기 일 수 있다는 이야기, 어쩐지 좀 과장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겪어 온 역사를 통해서 이해해 보면 또 생각이 달리진다. 한국 사회는 일본의 침략과 6.25 전쟁을 겪은 후 경제 성장에 초점을 두고 도시를 꾸려왔다. 단적으로 프랑스와 비교해 보면, 파리는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진행한) 오스만의 파리 개조사업(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도시이고 그 뼈대 안에서 문화가 발전했지만, 서울은 침략과 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터전에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고 동네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고속 성장으로 2000년부터 세계 GDP 15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에서야, 우리가 조금이나마 숨을 고르고 경제적인 뼈대와 기반 위에 살을 덧붙여 줄 ‘문화라는 키워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서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지역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창신동, 익선동, 경리단길 모두 한국 희로애락의 역사를 품고 있는 장소들이고, 한때는 누군가의 생계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었다가 이제는 그 필요성을 잃어가며 생겨난 여백 같은 공간들일테니 말이다.
흔히들 동양화에서는 '여백의 미'가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여백은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세대가 만들어가는 문화는, 우리 역사 속에 있는 여백의 미(문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가치화(revaluation)할지 고민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문화적 과도기라고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한국의 정체성은, 지극히 한국스러운 방식과 순서로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한류(K-culture)의 바람이 전 세계적으로 불며 전 세계가 한국의 변화에 주목하는 지금이 한국의 벨에포크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글을 마치며, 아직 반세기도 살지 못한 나에게 ‘공간이 유기적인 생명체’라는 말은 사실 잘 와닿지 않는 표현이었음을 고백해 본다. 얼마 전 창신동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창신동은 돌산 있는 동네고 가파른 절벽 지대라 접근성이 불리한 것은 물론 개발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겠구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창신동이 만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을 ‘지역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서 조사하다 알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창신동은 부유층의 주거지나 별장이 있는 소위 재벌 동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1920년대 경성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의 빈민들이, 당시 성 밖 동네였던 창신동에 몰려와 무허가 주택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이 동네의 이미지가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씁쓸한 변화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창신동의 공간도 이런 삶의순환을 겪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마음도 가져본다. 저물어가던 시간들을 오롯이 견뎌왔기에 또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 비어있는 공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그 유기적인 움직임이 사람들과 공생할 수 있는 계기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여백을 다루는 시선과 손길이 많아져 지역적 맥락을 담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더 많아지는 한국 사회를, 생명력 넘치는 한국 문화의 성장을 기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