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를 새롭게 해석 중인 한국 (1)
지난 주말, 창신동 절벽마을에 다녀왔다.
대전 소제동, 서울 익선동 등의 지역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local creater(지역 가치 창출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스페이스 솔루션 기업 '글로우서울'이 2021년부터 새롭게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절벽지대라는 독특한 지역 특색이 있은데, 이는 과거 서울의 주요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된 자연석을 창신동 돌산에서 떼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대에 따른 산업구조가 변하고 자연석의 필요성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신동의 유동 인구는 점점 감소하였고 동네의 활기도 많이 사라져 갔다.
'글로우서울'은 이런 위기에 봉착한 창신동에 주목했고, 서울의 과거를 머금고 있는 이 동네에 그 역사를 담은 브랜드를 기획하여 골목 자체가 유기적인 아이템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공간 스스로 살아 숨 쉬며 지역민들과 공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2023년 6월을 기준으로, 현재 오픈 예정인 브랜드를 포함하면 총 6개의 브랜드(우물집, 창창, 도넛정수, 밀림, 치즈공업사, 그리고 홍콩밀크컴퍼니)가 골목 곳곳에 위치해 있다. (참고)
인간에게 미식(美食)은 가장 근본적이고 직관적인 가치라는 이야기를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적 있듯, 창신동에 있는 서로 다른 6개의 브랜드는 F&B 콘텐츠를 기반으로 대중의 입맛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이 직관적인 방법은 언제나 그렇듯 공간에 점차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좋은 취지에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바람 하나를 더하자면, 이런 사업 안이 지속적으로 자기 확장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유입되는 인구의 발걸음의 조금 더 오래 붙잡을 문화 기반 콘텐츠들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이전에 몸담았던 회사에서 '경리단길 ART & DESIGN FAIR'를 기획한 적이 있다. 2021년 코로나 여파로 위축된 상권을 살리기 위해 용산구청과 협업해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이를 위해 경리단길 임대 공간에 신진 작가 전시를 기획하고 관련 상권 40곳과 협업해 여러 가지 참여 가능한 콘텐츠들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이런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어서 진행하는 일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는 내가 미술 관련 콘텐츠라는 부분에만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조감도(bird-eye view)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당시 내가 고려하지 못한 조감도는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문화예술과 부동산이라는 이질적이여 보이는 두 분야의 만남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흔히들 문화예술을 순수한 이미지(자본과 무관한 이미지)와 많이 결부시켜 이해한다. 아마 나 또한 이런 관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업계에서 조금이라도 일해본 경험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문화예술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자본에 기생하고, 자본과 유착관계(癒着關係)에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미술 분야만 보더라도 경제 상황에 따라 업계 매출이 보여주는 변화의 폭은 천차만별이고, 경기가 안 좋을수록 대중들은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소비를 먼저 줄인다. 물론, 미술시장의 안정성이 오랜 시간을 거쳐 단단히 자리 잡은 몇몇 국가에서는, 경제 상황이 안 좋아도 자국의 (큰 손) 컬렉터들이 시장의 기반 역할을 자처하며 전시 후원에 앞장서는 동시에 소형 갤러리들은 지속적으로 자국의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상당히 이상적인 구조가 구축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대다수의 나라에서 쉽게 직관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이상적인 구조를 제외하고, 보편적으로 보이는 문화예술과 자본의 유착관계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미술시장은, 예술품을 하나의 자산처럼 거래하며 통상정인 시장과는 다른 특징들을 보이는데, 이를 세 가지로 이야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품의 공급 탄력성은 0에 가깝기 때문에 작품 희소성이 가치의 원천인 경우가 대다수이고, 특정 작가나 작품의 수요가 많아져도 순간적으로 공급을 증가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둘째, 예술품은 주관적인 가치를 반영하기에 ROI(투자 수익률)가 상대적으로 불안정성하다는 인식이 많고, 이 때문에 대다수의 일반인이 주식이나 펀드보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셋째, 문화예술이 내포하고 있는 심미적 욕구는 메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에서 가장 고등 욕구인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부 사람들이 선택적(제한적)으로 소비하는 분야가 문화예술 관련 활동이며, 이 때문에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질 경우 우선적으로 소비를 감소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다면, 문화예술로 시장의 범위를 확장해 보면 어떨까? 위 특징들은 동일하게 관찰될까?
상황은 유사한 듯 다른 추이를 보여줄 것 같다. 예를 들어, 낙후된 A 지역에 전시장을 하나 만들어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수수료 포함 약 150원에 낙찰된 김환기 작가의 <우주>를 전시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작품에 관심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A 지역을 찾는 활동 행위가 만들어질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컬렉터와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문화가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문화가 특정 집단 혹은 지역 사회가 집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고로, 몇 사람의 방문이나 개인의 거래가 성립된 것만으로,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 이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술시장과 문화예술 이 두 분야 모두 자본의 영향 하 위치하며 경기가 안 좋을 때 유사하게 긴축에 들어가는 영역임은 동일하지만, 우리는 거래가 가능한 예술품과 달리 문화예술 자체를 자산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희소성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의 가치와 달리 문화예술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집단적인 규모 혹은 성향의 소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경기에 영향을 받는 유사성에도 차이점은 있다. 미술시장은 단순 경제 지표와 정비례하기보다는 *수요의 소득탄력성과 더 가깝다는 특징이 있는 것에 반해, 문화는 집단적 정체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인 범위의 자본과 더 긴밀하다고 구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요 소득탄력성 : 소득의 변화율에 대한 수입의 변화율을 가리키며, 소득이 변화함에 따라 수입이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가를 식별하는 지표.
결국, 미술시장과는 조금 다르게 문화예술 분야를 다룰 때는 집단적 정체성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수적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소프트웨어를 예술과 F&B 기반 콘텐츠라고 한다면 하드웨어는 자산 그중에서도 땅(지역 공간)과 관련된 부동산이라고 이해해 보자.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를 적절히 버무릴수록, 소위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가장한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생명력 또한 생기를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고려하는 지략을 발휘한 '지역 개발 프로젝트‘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앞에서 언급했던 '글로우서울' 이야기를 해보자. 이 회사는 크리에이티브한 공간 및 콘텐츠 기획은 물론 사업성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건물을 매입해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외부 지원 없이 매달 5% 수익률’을 낼 수 있는 조건을 따지고, 이런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이다. 단순히 콘텐츠(소프트웨어) 하나를 통한 단기적인 관심과 수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으로 상권과 지역 부동산을 먼저 생각하고, 그 이해도를 통해 지역적 특성이 담긴 콘텐츠를 담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다루며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일본 도쿄의 시모키타자와(Shimokitazawa)에 2016년 6월 문을 연 리로드(Reload) 상업공간도 주목해 볼 만하다. 'Context(맥락) - Content(내용) - Connection(연결)'을 통해 지속가능한 공간을 표방한 이 쇼핑몰은, 20년 넘게 부동산 디벨로퍼로 일했고 지금은 도시재생 전문가로 불리는 세키구치 CEO가 기획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리로드'는 2019년 철도 회사 오다큐 전철이 시모키타 역을 지나는 철도를 지하화하면서 선로 거리에 생긴 13개의 시설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인상 깊은 것은 이 쇼핑몰이 보여주는 ‘공생의 가치’이다. 이 공간은 ‘시모키타자와 지역에 뿌리를 내린 사람, 가게, 그리고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본 신념으로 하는데, 이는 세키구치 CEO가 주목한 이 거리만의 맥락(예, 주민들의 생활 방식, 상인들이 장사 모습)에 대한 이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질서 없고 서브컬처로 가득한 시모키타자와를 ‘리로드’가 대변하는 것을 방점으로, 세키쿠치 CEO는 쇼핑몰 도보 1분 거리에 '머스터드 호텔(Mustard hotel)'도 함께 운영하며, 이 지역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먹고(eat), 즐기고(enjoy), 머물도록(stay) 하는 구조와 콘텐츠 모두 단단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위의 두 사례들을 보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개발하는 것은 부지를 사서 첨단 시설을 개발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과는 다른, 유기적인 생명체를 만드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런 지역이 많아질수록 더 다채로운 문화가 살아 숨 쉴 테고, 예술이 사회 현상의 일부분이 되는 사회가 될 테니 말이다.
** 다음 편에서는 이번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한국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Stay tu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