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쫄보에게 찾아온 휴직기
9년간 직장인으로 쉼 없이 달려온 내게 드디어 휴직기가 찾아왔다.
비록 휴직의 달콤함을 맛보는 것과 동시에 양육이라는 새로운 업(?)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매일 규칙적으로 눈을 뜨고, 일요일 밤만 되면 긴장감에 뒤척이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새로움이다.
본격적인 쉼에 돌입한 지 어느덧 3주 차.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아니면 쉼이 주는 편안함이 이토록 좋았던 것을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해서일까. 아직은 매일이 재밌고 무엇보다 부담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게 참 좋다. 뭐, 물론 뱃속에 있는 초록이가 언제 나온다는 신호를 보낼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쓸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새벽 5시 50분. 평소 알람을 맞춰 일어나던 시간이었는데 알람을 분명 껐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눈이 떠졌다. 며칠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내 몸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짠하기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산을 위해 걷기라도 하자 싶어 이때부터 매일 새벽 한 시간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얼마나 오래갈까 의심했지만, 신기하게도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뒤에 정해진 일정이 없다 보니 내 마음대로 걷기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날그날 몸 컨디션에 따라 걷는 속도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습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성격유형 검사인 MBTI에서 맨 마지막으로 진행되는 검사는 "P(인식형)"와 "J(판단형)"으로 구분된다. 흔히 J를 계획형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강한 J 유형이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매일 플래너를 쓰고, 체크리스트를 만들며 계획하는 것을 즐거워한다^_^; 그런데 문제는 쉴 때도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계획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를 꽉꽉 채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쉬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나를 직면하는 게 처음엔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꽉 차 있던 하루의 무언가를 조금씩 덜어내고,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늘려가기도 했다.
"한번 해볼까 싶어 벌려둔 일들을 멈춰야 내가 원하는 뭔가를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을 멈춰야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난다." 강혁진 대표님의 책 '눈떠보니 서른'에 나오는 이 대목을 보면서 '아, 내가 이제 좀 쉬는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일을 멈추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만 멈추는 건 아닌가, 멈추면 뭐해야 하나, 굳이 멈춰야 하나 등등... 멈춤을 고민했던 적은 많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도 멈출 수 없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멈춤에 대한 두려움이 좀 더 컸던 게 사실이다.
아직 진짜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진 않지만 적어도, 쉼이 주는 공백 속에서 내가 나를 멀찌감치 보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쫄보인 엄마를 쉴 수 있게 과감히 밀어준 초록이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