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독서클럽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혼자 조용한 공간에 있을 때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여러 사람 속에서 끝없는 대화가 이어질 때 금방 지친다. 어서 자기만의 방으로 숨고 싶어 한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 어느 순간 깊은 지점에서 영혼의 저수지를 만난다. 부질없는 잡념과 복잡한 생각이 사라진, 내면의 에너지로 충만한 저수지다.[그림자의 위로]
그림자의 위로저자김종진출판효형출판발매2021.11.25.
말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말을 건네고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충만해야 나오는 나의 언어를 가로챈다. 그럴 때마다 산으로 갔다. 여러 색깔을 거느리며 사라지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던가. 인생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어했던 테레자는 그날따라 유난히 쓸쓸하고 우울해 보이는 강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을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치유되기 때문에 강가에서 서서 오랫동안 물을 보는 게 그녀의 습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저자밀란 쿤데라출판민음사발매2018.06.20.
출근하기 전에도 산에 갔다. 바빠도 산에 갔다. 말이 없어도 산은 나를 품었다, 2022년 지금, 1990년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때의 나는 충만해야 말이 나오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싶을 때마다 찾은 곳이 산인데, 가끔씩 떠오르는 나의 이십대, 내가 늘 오르던 그 산에서 나의 남자를 운명처럼 만났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다. 내 영혼의 저수지가 차오르고 있다. 몇시간 째 카페에 손님이 없다. 습관처럼 펴놓은 도화지 위에 여러 색깔을 거느린 인생을 그리고 있는데 테레자가 바라보는 강물이 나의 마음에 차오르고 있다.
"무슨 생각해요?"
손님도 묻고
사비나도 물어본다.
카페 구석 끝까지 빛이 들어와서 환한 대낮에, 굳이 빛이 없는 그림자를 찾아 숨고 싶었다. 아직 내 영혼의 저수지가 찰랑대고 있었다. 텅빈 카페를 지키고 있는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남자를 만난 곳이 산이다.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는 유일한 남자. 그를 만난 곳이 산이다. 말이 느리고 말이 없어도 현대식 변기가 하얀 수련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낸 건축가처럼 나의 남편은 나를 빛나는 여자로 만들어주었다. 변기 끈을 잡아당겨 물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휩쓸려 내려가면 육체는 자신의 추한 꼴을 잊고 내장의 배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도록 건축가는 불가능한 일을 실현했다. 말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나의 남자는 아름다운 베네치아 위에 화장실이 숨어있는 것을 감추는 건축가처럼 나의 단점은 숨겨주고 나의 장점만 드러냈다.
"무슨 생각해요?"
"저는 산을 자주 갔어요. 거기서 남편을 만났어요."
"타샤, 오늘은 다른데요, 얼굴이 빛나도록 예뻐요."
연애 시절을 상기하면 누구나 볼이 발그레해진다고 사비나는 덧붙였다. 목젖까지 차오른 나의 언어가 방언처럼 터졌다. 내면 여행을 끝내고 영혼의 저수지가 꽉 찰 때까지 사비나는 기다렸다. 굳이 그림자를 찾아갔던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사라졌다. 사비나의 마력이다.
"오늘도 운동하셨어요?"
화제를 전환하고 사비나를 위로할 차례다. 누군가는 걷는 것이 운동이냐고 했다. 누군가는 걸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힐난했다. 사비나에게 운동은 방을 나와 길로 떠나는 그 단순한 작업이 내면여행 일 것이고, 잠시만 걸어도 숨이 차고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그 작업이 내가 산을 타야 영혼의 저수지가 차오르고 흠뻑 젖은 땀 냄새까지 사랑했던 남자를 만났던 그 통로일 수 있다.
눈치 챈 걸까.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를 세 번 이상 부딪히면 운명으로 볼래요."
내 남자는 나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했다. 말할까, 운명은 첫 만남으로도 안다고. 아직 내 언어가 차오르지 않았다. 섣부르다.
"세 번 부딪힌 남자가 유부남일 수도..."
사비나는 동정과 연민을 구분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궤변했다. 유부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책을 논할 수 있는 남자인지를 파악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에서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만 달라는 동정을 구하는 눈빛이 차올랐다. 이미 그녀의 책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를 읽었다. 나는 그녀의 연애 이야기를 안다. 그저 들어주는 것이 그녀를 위로하는 것. 그녀의 그림자에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비나, 동일한 이름이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사비나는 세번 읽었다고 했다.
"타샤, 모든 남자가 사랑한 사비나의 매력이 뭘까요?"
매력이 없어도 한 순간에 눈이 멀 수 있을까. 나는 매력이 있었나. 내가 산을 타고 나의 남자가 산을 타는 그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작가님도 매력이 있어요."
우문현답일까. 사비나는 질문을 잊었나, 아이처럼 웃는다.
사비나는 아직 세 번이상 부딪힌 남자가 없나보다. 10대와 공부하고 20대와 술을 나누며 구순 노모와 드라이브를 한다. 공부하지 않는 10대를 걱정하고 술을 나눈 20대를 위로하며 혼자 사는 노모를 축복하는 사비나를 보면 나의 언어가 차오른다. 강물을 바라봐야 평안한 테레자처럼 사비나를 한참 지켜본 내가 먼저 말이 차오른다.
"작가님은 혼자 있어도 큰 세계와 결속한 것처럼 늘 충만해보여요.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부러워요."
"아이러니죠. 고독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만나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니까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로 가득한, 세계 이면의 세계죠. [그림자의 위로]"
그녀는 말했다. "빛을 따름으로써 빛을 찾아야 한다"[by 성 베르나르]
내 남편이 나를 빛나게 했듯, 빛을 따름으로 빛나고 있는 그녀가 남자를 만나기를 기도했다.
사비나가 그녀의 걷기 일지를 인스타그램에 인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스토리가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나는 응원한다. 조용히 하트를 눌러주는 나의 마음이 백 번이 되면 우연히 만난 남자와 사비나가 책을 논하고 있을까. 웃음이 났다.
그녀를 응원하는 우아한 독서클럽 멤버들은 토마토를 먹어봐요., 다이어트 약을 먹고 걸어봐요, 오늘도 걸었어요? 관심이 많다. 이제 한라웨스턴파크 주변에서 사비나의 걷기는 익숙하다.
"세 번 만난 남자 있나요?"
"걷는 시간을 바꿀까봐요. 출근시간? 퇴근시간?"
"작가님, 그렇게 남자 이야기 자주 하시는 걸 보면 언젠가는 이뤄지시겠네요."
말한대로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 자기 개발서 책처럼 툭 내뱉은 위로들이 사비나의 마음에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갔을까. 남자를 만나기 힘든 공간일까. 사비나가 며칠 그림자를 찾고 있다.
자신이 설계한 건축과 공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대지와 하늘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는 건축, 그 건축물을 지은 바라간은 텔레비전과 디지털 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 온전히 걷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걷는 그 공간에서 에너지를 받고 싶어요. 걷다가 힘들면 벤치에서 쉬어 가고, 다시 힘이 나면 맞은 편 도로까지 걸어가서 그림자가 만든 그늘에 쉬어갈게요."
그녀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갔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
카페에 손님이 없다,
한라웨스턴파크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걸음을 따라 가기에 나의 걸음은 빠르다.
그녀의 그림자를 찾아가자.
그녀는 그림자에서 위로를 찾았나보다. 웃고 있다.
아무 일 없듯 카페로 돌아가기에 나의 걸음은 빠르다.
한 번만 더 돌아보자.
아....그녀 앞으로 남자가 걸어간다.
세 번째 부딪힌 남자일까.
그녀가 웃는다.
그녀와 책을 논할 수 있는 남자일까.
나는 자꾸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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