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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Aug 09. 2020

생각의 온도

현상은 겉사람이고 본질은 속사람이다.

-나는 말이야 너를 하루 종일 생각했어.
-나도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데...
-나만큼일까.. 나는 너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누군가를 오래 생각했다면 내가 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를 생각하면서 머리가 아팠다면 생각이 깊어져 그를 향한 생각이 뜨거워진 걸까?


생각에는 온도가 있을까?


햇볕 좋은 날이다. 창가에 앉아 공기 속으로 햇빛 알갱이들이 퍼져가는 것을 오래 바라본다. 어린 나무의 이제 막 한 금 생겨난 물기 많은 나이테처럼, 혹은 해변을 적시는 보드라운 물거품처럼 적요하고 기분 좋게 내 살갗에 어릉지며 떨어지는 햇볕을 만끽한다. 오늘의 햇살은 아주 제대로 익은 듯하다. [김선우의 사물들 에서]

김선우 작가는 손톱깎이라는 사물을 묘사하기 위해 태양의 기운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햇빛’과 ‘햇볕’ 그리고 ‘햇살’

‘빛’이라는 말을 ‘볕’이라는 말속으로, 다시 ‘볕이라는 말을 ‘살’이라는 말속으로 프렌치키스를 나누듯 밀어 넣었다.

김선우 작가의 묘사에 감탄을 하다가 문득 1993년 결혼식 뒤풀이가 떠올랐다. 남편과 1년 연애를 하고 10월의 신부가 되었을 때, 결혼 이후의 삶을 예견하지 못하니 그렇게 행복한 신부의 얼굴을 하고 남편 친구가 건네는 짓궂은 제안에 수줍게  응했다.

-자! 이 컵에 들어 있는 계란 노른자를 신랑의 입에서 신부의 입으로 옮기는 겁니다.

연애를 1년이나 했으니 우리가 프렌치 키스만 했겠냐 말이다. 남편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계란 노른자가 아주 Deep 하게 옮겨졌다.

그때, 남편과 내가 나누는 노른자 키스를 지켜보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미야, 너 진짜로 00 씨 좋아하는구나?

그 친구의 지론에 의하면 남자의 입에 들어간 음식을 어떻게 먹냐는 것이다. 그것도 망설임 없이..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 남자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알게 된 남편의 역사는 충격적이었다. 이미 학력을 속인 것은 알고 있기에 내가 번 돈으로  검정고시를 치르게 했으니 아픈 가족사를 가진 그를 품어주며 도닥이며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가 머물고 있는 세계는 도박의 장이었고 ‘일’을 거부하는 그의 한량 끼는 기도로 품어주기엔 참 버거웠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살’은 참 따뜻했다.. 혈액순환이 안되니 냉기가 흐르는 나의 몸과 다르게 그의 살갗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오른쪽 손은 목발에 의지하고 왼쪽 손은 항상 남편의 손이었다.

찬 냉기가 사라지고 손가락 사이로 타고 들어오는 온기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주는 ‘햇살’처럼 포근했다.

그래서 나는 ‘햇빛’보다 ‘햇볕’보다 ‘햇살’이라는 단어가 참 좋다.


김선우 작가는 말한다.

‘햇빛’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지닌다면, ‘햇볕’은 촉각을 환기하며 감각의 주체에게 보다 가까이 있고 ‘햇살’에 이르면 통각이라고 한다. [몸이 섞여서 느껴지는 살이 눌려지는 그 감각] 말이다.



지겹게 비가 내린다.

호우주의보가 호우경보로 바뀔 때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의 옆 집, 17년째 방치하고 있는 폐가의 지붕이 가라앉았다. 일본식 목조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차이나타운의 풍경이 예뻐 보이지 않는 순간은 내가 현실로 돌아올 때인데,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만큼 아주 큰 소리로 가라앉은  폐가 지붕이 우리 집 벽의 ‘살’을 뚫고 폐가가 갖고 있던 있던 빗방울을 1층 카페로 전이시키고 있었다.

카페로 내려앉은 새는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들이 속상하겠다.

그리고 바보 같이 생각이 확장되었다.

-폐가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춥지는 않을까? 지붕에 눌리지는 않겠지.


내가 그렇다.

‘햇살’이라는 단어에 프렌치 키스가 떠오르고 결혼식 뒤풀이가 떠오르더니, 힘들게 해서 헤어졌던 [전 남편]이  [남편]이라는 단어로 환기가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추억이, 추한 그의 역사가 아름다운  ‘살’로 전이되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생각에는 온도가 있을까...

내가 그를 더 생각하면 내 생각의 온도는 뜨거울까?

-엄마는 이상을 살아.

-언니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내가 문제일까... 고개 숙인 사람이 [아프다]고 고백하면 지갑을 열어 돈을 주고, 지금은 돈을 못 버는 데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상담비]를 받지 못하는 내가 문제일까...

아픈 나를 도와주는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며 수시로 건네주는 돈의 의미가 퇴색되고 오히려 그녀가 베푼 호의를 청구받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문제일까...

컴퓨터라는 기계에 ‘맹’ 하니 유튜브를 찍으면서 편집 같은 것은 나의 몫이 아닌데, 선한 마음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돈을 요구했고, 돈의 단위가 달라질 때 생각했다.

아... 나 뭐 하고 있니...


내면 여행을 하면서 모든 연락을 끊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성경을 필사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6-18]

생각이 기도가 되는 그와 그녀를 위하는 긴 생각의 시간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현상을 보고 판단을 했다. 겉사람을 보고 억울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용기를 낸 것이고,  그는 긴 편집 시간에 어려운 가정사가 겹쳐서 어렵게 요구했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속 사람을 알 수 없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그게 편한 거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사기를 당하고 돈을 조금 더 벌지 못하는 나를 미사여구 잔뜩 붙여 변호하고 싶지 않았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보이지 않는 속 사람에 치중을 할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외하고 살 것이니.



다섯 명의 시각  장애인에게 코끼리를 만져보라고 했단다.

배를 만져 본 사람은 벽돌이라고 했고, 코를 만져 본 사람은 구렁이라고 했고 꼬리를 만져본 사람은 밧줄이라고 했다는...

이 우화의 교훈은 [코끼리는 코끼리일 뿐이다]

생각에는 온도가 없다. 더 많이 생각한다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부담도 될 수 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이다. 우리는 그의 겉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현상을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속 사람이다.

견고하게 다지고 깨어있지 않으면, 현상에 굴복하고 겉사람에게 속아버리니 감성 충만하여 ‘햇살’에 반응하고 내가 더 많이 생각하는 생각의 정도를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의 속 사람은 변했다.

아마 나의 겉사람은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이다. 품어주고 안아주면서 위로하고 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속 사람은 변했다.

생각에 온도가 없다는 것을 알만큼 나는 성장했다.


생각의 온도는 언제나 37 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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