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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Aug 25. 2020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2

데미안

자퇴했습니다.

언뜻 보면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자세히 보면 더 어려 보이는 청년이 찾아왔다.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를 출간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책을 읽은 독자의 모습으로 찾아와서 의례적인 나의 질문에 [자퇴했다고 했다]

-어려 보이네요, 학생인가요?

-자퇴했습니다.

순간 고민했다, ‘대학을, 그럼 휴학이라고 하니...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건데...’


[자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듣는 사람들은 리액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숱하게 가르쳤으니, 어려 보이는 청년의 발그레한 용기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호.. 어떤 이유로?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은 예술가 유형이라고 명명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 그리고 대인관계의 연결과 단절에 주의를 집중하며, 감정을 폭넓고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선생님, 제가 작가 지망생입니다.

-그렇군요.

틀에 박힌 학교 수업이 지겨워지고, 선생님들의 이중성에 질릴 때, 그는 수업 시간에 자는 것으로 저항을 표했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감정에 뿌리를 둔 의미 있는 상호관계를 원했고, 그 감정의 느낌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니,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그의 수학 노트는 캔버스가 되고  수학 노트의 방정식과 함수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얼굴이 예쁜 교생의 인물화가 자리 잡았다고 했다.


이미 책을 수 백 권을 읽어서 일상어를 문학적인 언어로 대체했으며, 사고가 깊어 질문에 오래 고민하고 느린 호흡으로 뱉어내니 그룹이 아닌 일대일 인문학 수업을  별도로 해야 했다.

-데미안 읽어 봤어요?

-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다르니...

-그게 정상이죠.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은 위축되고 내성적이거나, 에너지가 많고 적극적인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1번 유형의 완벽성이 보이고 조직 내에서는 2번 유형의 조력자 유형도 잘 해낸다.

문제는 양가감정이 지나치게 큰 간격으로 자리 잡은 유형이라 위축되고 내성적으로 변할 때, 사람들은 말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군요.

-그대는 까다로워요.


그러나 나는 에니어그램 전문가로 4번 유형의 학생들을 [숙식]으로 가르쳤다.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던 3명의 학생들 모두 [가슴형]이라고 지칭하는 4번 유형이었으니, [숙식]으로 함께하는 그 시간의 기록이 모여 나는 그들의 행동을 파악했다. 그들은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이 아니라, 부와 모의 성격이 너무 판이하고 너무 상이해서 오는 그 괴리감을 오롯이 이겨낸 상처 아이였으니, 나는 4번 유형을 안아주는 것에 익숙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이런 유명한 문장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요...?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니 다른 차원으로 읽혔어요..

-그렇죠.. 명백해 보이는 것들조차 달리 볼 수도 있죠,  그런 깨달음이 비판적 인식의 첫걸음입니다.

-그런데요...

더 느려진 호흡 위로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니, 싱클레어가 데미안이고 데미안이 헤세인 것 같아요.

-... 음... 헤세의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 많긴 해요.

-네, 헤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보이니까 책 구절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더라고요.

-뭐라고 하던가요?

-결핍이요.

  엄마는 현모양처였어요. 남편에게 자식에게 잘했죠. 그런데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했나 봐요. 그렇게 엄마를 지적하고, 술을 먹으면 가계부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엄마가 낭비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에게 혼이 나면 다음 날부터 우리들이 먹는 반찬의 모양이 바뀌었어요.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 먹었다는 거네요..

-네...

4번 유형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그 시기를 내면의 결핍으로 양산하고 성장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없을 거야...]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청년은 눈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순수한 눈빛이 가끔은 스무 살 청년의 얼굴을 10대 언저리에서 덜 자란 미성숙의 표현으로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우울해 보이네요.

-선생님.. 데미안이 말이에요... 싱클레어를 악마같이 괴롭히던 크로머를 혜안의 힘으로 쫓아 주잖아요.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와 다른 또 하나의 유년의 세계를 상징하던 크로머가 더 이상 싱클레어의 내면에 개입하지 못하게 해 주잖아요...

-그렇죠

-처음이자 마지막인 직접적인 도움인데요... 결국 싱클레어를 유년의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요. 결국 싱클레어는 온전히 자신만의 길로 걸어가잖아요.


예측할 수 있었다. 나의 도움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립하고 싶은 말을 돌려 말하고 있던 것이다.

-선생님, 저  노가다 해보려고요. 당분간 책은 읽지 않겠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가 볼 게요.

-돈을 버는 목적은요?

-엄마가 아프세요. 돈이 필요해요..


청년과 헤어지고 한 달이 지났나, 청년의 전화를 받을 때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를 다운로드하고 세 번이나 돌려보고 있을 때.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어디 책뿐인가, 나는 오드리 헵번의 외모를 보았던 그 영화가 내면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여자의 결핍이 보이고, 그 결핍을 해결하는 것, 그 해답이 결국 [사랑]이었다는 엔딩 장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아직 인문학 수업하세요?

-네. 잘 지냈어요?

-네, 이제는 돈 벌면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이 어떤 가요?

-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있지만 대화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요...? 저랑 대화합시다.


그렇게 다시 그의 편에서 그를 위한 책을 선별했다.

-다음 책은 단테의 신곡 어때요?

-어렵지 않을까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벌을 받아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단테의 묘사만 토론해 봅시다. 절망에 항복하면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해요. 다음 주 수요일에 만나요.

그와 전화를 마무리하고 멈춰 두었던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를 5분 전으로 돌려보았다.

난 할리도 룰라 메이도 아니에요.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난 이 고양이처럼 이름도 없고 누구의
소유도 아니에요.
[홀리: 오드리 헵번]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한 채 살아가요.
[폴: 조지 페파드]

‘아, 얼굴만큼 멋진 대사다. 단테의 지하세계를 논하는 것이 싫다고 하면 영화를 봐야겠군...’

성공했다.

진한  키스신도 없는 12세 관람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를 보면서 청년의 순수한 눈빛은 성숙한 눈빛으로 바뀌어갔다.

-이 영화가 이렇게 심오한 영화였군요?


인문학 수업이 그렇다.

책이어도 좋고 영화여도 좋다.

인생을 논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노출하는 용기만 생긴다면야.


나는 오늘 오드리 헵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를 또 볼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그녀 자신으로 이입했던 이름 없는 고양이 [cat]가 보이고, 비가 내리는 곳에서 서로 안아주는 엔딩이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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