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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20. 2024

운명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금산재에서 만난 김유신

김유신.

아마 한국인 중 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흔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장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김유신을 떠올리면 어딘가 슬프고 비운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정말이지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인간승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패망국의 왕족에서 신라의 화랑, 대장군에 이어 왕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죽어서는 왕의 자리에까지. 

이 한 편의 글에서 김유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 논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도 짧다. 그리고 내가 그의 삶을 풀어낼 만한 역량도 되지 않고. 다만 주변인이었던 김유신이 역사의 중심에 서기까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김유신은 성공의 모습이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시간에 주목해보았으면 한다.


김유신은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후손이다. 알다시피 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신라에 병합된 이후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는데 김유신의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구형왕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패망국의 왕족이면 평생 감시받다가 끝내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실제로 그런 삶이 많았으니까.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백제의 마자믹 왕인 의자왕과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은 모두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 모든 권한을 박탈 당한채 삶을 마감했다. 


그래도 김유신의 가문이 다른 왕족들의 사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김무력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신라의 신하가 된 이후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앞장서서 활약했다. '신라장군 이사부'로 유명한 그 이사부가 활약하던 당시에 그의 부관으로 단양적성 전투에 참가한 것은 물론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을 때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신라가 이 지역에 새롭게 설치한 지방관에 김무력이 임명된 것은 더는 그가 경계해야 할 가야세력이 아니라 신라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김무력이 그렇게 힘들게 쌓아 올린 공은.. 그의 아들인 김서현의 '사랑'으로 모두 무너져 버린다. 서현은 당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이었던 숙흘종의 딸 만명과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 사회에서 이는 용인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숙흘종은 진흥왕의 친동생으로 신라 사회에서 최고의 계층인 성골이었고, 그의 딸인 만명 역시 성골이었다. 김서현은 가야의 왕족이었으므로 진골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름만 진골일 뿐이었고 신라의 성골 입장에서 보자면 패망국의 후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에는 사위가 왕이 될 수도 있었으므로 김서현과 만명의 결합은 곧 김서현이 추후 왕위에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적인 신라의 성골 입장에서 보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셈. 그러니 숙흘종은 둘의 사랑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고 딸을 별채에 가두어 둘을 헤어지게 하려 했으나, 만명은 집을 도망쳐 나와 서현과 함께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지역인 만노군으로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이에 분노한 숙흘종은 김서현이 더는 신라의 중앙 정계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노군 태수로 임명해 버린다. 그의 이런 선택이 과연 정말 사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망국의 후손으로 야망을 가진 선택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오랜 시간 김서현은 아버지와는 달리 지방 작은 고을의 태수로 지내야 했다. 


이후 어떤 계기로 김서현이 다시 고위직에 오르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아들 김유신이 태어난 이후로 어느 시점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숙흘종 입장에서는 사위는 꼴도 보기 싫지만 그래도 딸이 나은 손자는 자신의 핏줄이니까. 


그렇게 김유신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지금도 진천군에는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로 알려진 곳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전하고 있다. 부모님의 사랑이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었다 보니 김유신의 유년기도 순탄했을 리는 만무하다. 어쩌면 출생부터 힘든 삶이 시작된 셈. 그것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요인들에 의해서 말이다. 김유신의 삶의 대부분은 어쩌면 이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삶의 요인들을 바꾸어 나간 삶. 


부모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김유신은 인정받지 못하는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을 것이고, 외할아버지 숙흘종이 부모님을 인정한 이후 서라벌로 상경한 뒤로도 아마 그에게 꼬리표가 따라다녔을 것이다. 


야, 쟤가 김유신 이래. 쟤 아빠가 엄마 몰래 데리고 도망갔다던 걔. 


신라성골, 혹은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김유신은 놀리기 좋은 놀림감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김유신은 그에 굴하지 않고 이겨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에 들어가 낭도들의 수장이 되면서 용화향도를 이끌게 되었고 결국에는 화랑을 이끄는 국선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이후 신라가 고구려의 백제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전장에 나서서 전공을 세우면서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 김무력처럼 신라는 물론 삼한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고 김유신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히려 신라는 멸망 직전 단계까지 가기도 했다. 선덕여왕 시기, 백제의 의자왕이 장수 윤충을 이끌고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지금의 합천인 대야성은 동쪽 방면에서 오는 공격은 막기 어렵지만 서쪽, 즉 백제 지역에서 오는 공격은 막아내기 매우 쉬운, 그러니까 백제에서는 오랜 시간 함락시키지 못했던 그런 성이 함락된 것이었다. 특히 대야성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 오늘의 경주로 오는 길목의 요충지로 이곳이 뚫리면 서라벌 방어선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대야성이 함락된 것이다. 


이후 김유신은 오늘날의 경산지역인 압량주의 군주가 되어 백제가 쳐들어 오는 길목을 막는 사령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한창일 때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 이때 비담의 난은 정말 신라가 망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반란군의 세력이 꽤나 강력해서 이들은 지금의 경주 시내에 있는 명활산성으로 들어가 군대를 정비했다. 이들이 백제나 고구려와 연합을 맺고 양쪽에서 협공한다면 신라는 그대로 끝이 날 운명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큰 별 하나가 월성으로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유신이 꾀를 내어 밤에 허수아비에다 불을 붙여 연에다 매달아 띄우고는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반란군의 기세는 꺾였고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신라에서 김유신의 명성은 높아갔고 백제정벌을 비롯한 통일전쟁 시기에는 왕 다음으로 신라 군을 통솔하는 장수로써 활약한다. 고구려 정벌 시기와 나당전쟁 시기는 노령화로 인해 이전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최고위직인 대각간 위의 태대각간이라는 상징적인 관직을 맡으면서 여전히 신라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었다. 그런 그도 결국 신라의 완전한 통일을 보지는 못했다. 668년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이후 당나라가 신라까지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벌였는데 역사적으로 나당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무려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이나 이어졌다. 김유신은 673년 눈을 감았으니 문무왕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전쟁을 끝내기 전에 숨을 거둔 것이다. 


이후 김유신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신라의 왕족 외에는 유일하게 왕이 되었다. 


그가 어떤 인간적인 고뇌를 겪었는지는 지금과 같은 유튜브나 블로그, 인스타 같이 개인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환경이 없었으니 알 수가 없다. 남겨진 기록, 그리고 김유신이 겪었을 상황들을 바탕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남겨진 기록만으로도 김유신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갔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대다수의 몰락 왕족의 경우 항상 죽음과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든 그를 중심으로 반란세력이 뭉칠 수 있기에 견제 대상 1호였으니까. 하지만 김유신은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스스로 벗겨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야를 배신한 후손이 아닌,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유신 그가 스스로 택한 그의 길이, 그가 만들어 간 그의 길이 지금 우리에게 기억되는 김유신이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역사.

과거의 기록을 단순하게 암기하고 나열하는 것은 지루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든다. 하지만 과거의 사실을 오늘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리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역사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다. 1400년 전 김유신의 삶이 오늘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아도 그의 삶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니까. 


경주 시내에는 김유신의 무덤인 흥무왕릉과 그를 모시는 사당인 숭무전, 그리고 재실인 금산재가 있다. 금산재는 재실보다는 칼국수 가게로 유명한데,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면 숭무전과 함께 김유신장군묘도 둘러보도록 하자.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인 숭무전



경주 시내에는 김유신의 무덤인 흥무왕릉과 그를 모시는 사당인 숭무전, 그리고 재실인 금산재가 있다. 금산재는 재실보다는 칼국수 가게로 유명한데,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면 숭무전과 함께 김유신장군묘도 둘러보도록 하자. 




김유신을 모시는 재실인 금산재


벚꽃시즌이면 경주에서 제일가는 벚꽃명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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