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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11. 2023

2_뭐하며 살래

느려도 괜찮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즈음 이후의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를 쳐내기 바쁘게 연말을 보냈다. 겨우 졸업요건을 맞춰서 추가학기를 다니지 않게 되었을 때 그제야 이제 무얼 하지, 그런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하게 당장 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잠깐 나에게 주는 휴식이 필요했고 그러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걷기였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이동 방법.

바꿔 말하면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오랜 시간 유지해 온 이동 방법이자 신체가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걷는 동안은 행복했다. 특히나 경주같이 곳곳에 문화재와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걷는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경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하더라도 사진으로 순간을 담아내는 재미는 걷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었다. 빨리, 더 빨리, 빠르게, 더욱 빠르게. 갈수록 빨라지는 시간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느리게 가면 안 되냐고, 천천히 가도 충분하지 않냐고. 뭐 그리 급하게 빨리 가야 하냐고. 삶에는 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을 잘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속도가 아닌 밀도라고 생각했다. 흐르는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바람과 물길을 보지 않고 그저 배를 물살에 맡기는 것과 차근차근 준비하고 파악하면서 가는 건 그 끝이 다를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경주와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들을 찾아가고, 마을에서 어르신들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서 경주에서 계속 살아봐도 좋겠다 생각했다. 미래를 위해 모두가 서울로 가는 흐름에서 나는 홀연히 벗어 나왔다. 처음부터 도보여행길을 만들고자 시작한 건 아니었다. 걷다 보니 걷기 좋은 길이 참 많았고 그 길들이 그냥 머릿속을 비우고 걷기 좋은 길도 있지만 과거의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는 만큼 그 유산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참 좋았다. 제주의 올레길이 주로 제주만이 가진 자연환경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면 경주의 도보여행길은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삶’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경주의 걷기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는 어떤 흥분도 나를 여기에 몰두하게 했지만 사실 그런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그 경험이 내게는 무엇보다 큰 행복이었다. 걷고 걷고 또 걸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 때, 그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내게 걷는 시간은 경주라는 도시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혼자서 여행기를 쓰는 정도의 일을 하고자 했다면, 그래서 지역에서 여행가이드나 여행사를 하고자 할 목표였다면 관광상품으로 만들었을 거라 혼자서 해 나가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세운 목표는 청년들과의 실험이다.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곳 경주에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내게 맞는 길인가 그것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 지나온 과거가 의미를 갖는 건 오지 않은 미래와 바꾸어 나갈 현재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보며 나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 우리 모두의 삶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시간을 가져볼 기회조차 없이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채 공부를 잘해야 한다 ->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 좋은 직장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얘기를 정말 많이 들어왔고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멸시받고 천대받는 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니까.

전혀 다른 원칙을 추구하는 저기 휴전선 너머로 갈 것이 아닌 이상 이런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맞다. 그 원칙을 인정하고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대학교에 와서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충격 하나는 돈을 버는 진짜 방법은 내가 돈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따라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쫓아가는데 급급하다 보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닌 돈이 되어버린다. 모든 기준이 돈이 되어버리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으며 돈을 벌 수 없는 일은 무의미한 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돈을 많이 벌었다는 사람들은 남들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걸 바탕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돈이 나를 따라오게끔 하는 방법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경향이 더더욱 심해질 거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인간이 해 왔던 많은 단순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고 점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의 폭이 좁아지게 될 테니까. 먼 훗날 모든 인간이 아예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삶은 내가 죽고 나서야 될 것 같아서 잠시 생각을 미뤄두기로 했고 (하지만 이런 틈을 노리는 것도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한 밑그림을 지금부터 그려봐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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