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생님이라고?

나의 인생 첫 수업

by 류지숙




내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흔히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봤다. 그 당시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는 대통령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이제 인생 10여 년 산 아이들이 뭘 안다고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지...


아주 어릴 때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6학년때였나? 누군가가 의미 없이 묻는 장래희망 질문에 "고고학자요!"라고 대답했더랬다.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예상가능하듯 "그거 돈 안 되는 직업이야"였다.

내가 자라온 시대는 그랬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중,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성적에 맞는 대학엘 진학을 하고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장래희망은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소서를 쓰고 인터뷰를 보고 그렇게 취업을 했다.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내 또래의 많은 여자들이 갈망하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명품 브랜드 화장품 회사였다.

하지만 실상은 이제 막 고용이 된 인턴.

10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열정페이로 받으며 7시 이전에 퇴근해 본 적도 없고, 매달 말 일이 되면 백화점 문을 닫는 8시 30분부터 다음 날 회의에 써야 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의 자료를 만드는 게 주 임무였다.

당연히 초과근무 수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나에게 떨어지는 보상은 회사카드로 저녁을 사 먹고 택시비를 내는 것이 다였다.

밤 12시가 넘어 울면서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던 오빠가 어김없이 맥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빠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나는 큰 기계의 부품, 너는 외국 기계의 부품일 뿐이야" 라며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캐나다에서의 직장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대학교육을 받은 사무직 직원이 아니라 보석감정사로서의 첫 시작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 일이 내가 꿈꿔오던 직업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영어 공부 겸 자격증을 취득했던 거고 사무직보다 적응이 쉬울 것 같아 기술직을 선택한 취업이었다. 그렇게 캐나다의 생활이 적응이 되어 갈 때쯤 아이를 갖게 되었고 출산을 한 달 남겨두고 썼던 육아휴직은 그대로 퇴사로 이어졌다.


내가 태어나서 나고 자란 곳이 아닌 곳에서, 내 언어를 쓰지 않는 곳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행이었다. 한국이었다면 동네 문화센터에 가고 조리원동기 모임을 하며 맘카페를 들락 거렸을 터이나 이곳에서는 물어볼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가 커 갈수록 집에서 지내는 아이와 나 단 둘의 시간은 나를 많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상담을 받았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상담사가 내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는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기질에 관한 책을 추천해 줬다. 그 책 내용에 외향적(extrovert)인 아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었는데 우리 아이를 글자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육아에 전념을 하며 둘째까지 낳아 키우다 보니 어느새 경력단절녀가 되어있었다.

지난해, 코로나로 인해서 3년 동안 가지 못했던 한국에 방문하니 내 친구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멋지게 자기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남았더라면 저들과 같을 수 있을까?


캐나다에 돌아와서는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학교가 일찍 시작하고 일찍 끝나는 두 아이의 육아는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이 일을 우선순위로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 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한국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건 고국방문이 준 선물이었다.

지난 9년, 육아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 보면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큰 아이는 4학년이라서 혼자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책 읽기를 지독히도 싫어하기에 지금도 두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책을 읽어 주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다시 일을 하게 된다면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이 들어 영어 독서 지도사 자격증을 막 취득한 참이었다.

토요일마다 가는 한글학교에 큰 아이 반 변경 문제로 교장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교장선생님께서 넌지시"한글학교 선생님 한 번 해보실래요? 잘하실 것 같은데" 하고 물어보셨다.

그 순간 번개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선생님을 한다고? 의구심도 들었지만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난 누구보다 내 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내 나라의 역사도 사랑하고 내 나라의 문화도 사랑하고 내 나라가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외국 생활을 하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한 번 선생님을 해볼까? 마음을 먹으니 수업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떠올랐다.

'코리아 넘버원'을 시청하면서도 한국의 생태계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한글 책들 중에 어느 책이 스토리타임으로 적당할지 리스트도 만들었다.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는 과정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의 연속이었다. 내가 과거 근무 했던 곳에서 2 사람의 레퍼런스를 받아야 하고 범죄경력조회도 신청해야 했다. 무엇보다 10년 넘게 연락한 적 없는 예전 상사들에게 연락을 드려 레퍼런스를 부탁드리는 일은 그분들께 너무 죄송했다. 교육청에서 2장의 질문지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그분들이 답변을 적어서 다시 이메일로 보내야 했는데 예전 상사 한 분이 인도로 출장을 가 계셔서 답변이 많이 늦어졌다. 캐나다에 살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해진 방법으로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며 놀랍도록 오래 걸리는 속도에 내 속은 타들어만 갔다.

'우리 팀의 멤버가 된 걸 축하해'라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어 즐거워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게 걸린 채용 과정이 끝나고 드디어 나의 첫 수업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4,5, 6학년 아이들을 맡게 되었고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해가 바뀌고 시작되는 첫 수업, 1월 14일 토요일인 것이다.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성격인데 선생님이 되어 수업을 이끈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수업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문서화시키고 이미지를 더해 수업자료를 만들고 교과서에 떠오르는 질문을 일일이 다 적어놓았다.


그렇게 1월 14일이 되었다.

예민하게 굴지 말자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남편 가슴에 상처가 되는 말 한마디 던지고 문 밖을 나섰다.

교육청의 한글학교 담당자로 부터 내가 쓸 교실이 추가되었다고 연락을 받았으나 막상 당일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 관리자는 추가된 허가 리스트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20분이 흘러가고 임시로 쓰게 될 교실을 배정받았다. 아이들이 자리에 모두 착석하고 그 앞에 섰을 때 드디어 선생님이 되었구나가 실감이 났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교과서에 미리 적어 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동료 선생님께서 처음 10분이 제일 힘들 거라고 하셨는데 그 10분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한글을 잘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수업에 대한 참여도 또한 높았다.

내가 수업을 하게 된다면 꼭 스토리타임을 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내가 고른 첫 책은 "괜찮아 아저씨"다.

4,5, 6학년 아이들에게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힘들일이 생겨도 "오, 괜찮은데"하며 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골랐다.


장래희망이 뭐예요?라고 묻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선생님이요"라고 대답해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선생님이 되었다. 그것도 멀고 먼 이곳 캐나다에서 말이다.

내 아이 말고도 나의 영향이 미칠 아이들이 더 생겨났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한국을 나만의 방법으로 알려주고 싶다.


나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의 한글학교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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