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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Aug 02. 2019

집으로 휴가 가기

산남일기 #08

휴가 절정기인 8월 초로 휴가를 정해놓고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 일단 수험생이 있으니 멀리 가기는 어려워 해외 여행지는 모두 제외했다. 동해안, 서해 바다, 산, 온천 등등 몇 군데를 떠올리다 운전하느라 땀 빼고 숙소 잡기 위해 집중 서칭해야 하는 온갖 노고들이 떠올라 생각만으로 피곤해졌다. 그리하여, '집으로' 휴가지를 결정했다.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집에서 휴가처럼 보내겠다 생각했다.


이사 온 지 두 달째. 집 곳곳에 주인에 손길을 기다리는 부분이 있었다. 2층 작업방도 정리해야 하고 텃밭도 모종 다시 심고 잡초 뽑고 할 일이 많았다. 테이블보도 몇 개 더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여행의 이유를 먹는 것에서 찾는 우리 가족들이니 최대한 맛있는 것 찾아서, 혹은 사다가 먹고 산이 가고 싶으면 심학산에 오르고, 책도 읽고 멍 때리기도 하며 캠핑 온 것처럼 뒹굴거리며 지내면 최상의 휴가가 될 것 같았다.



8월 1일 휴가 첫날! 눈을 뜨니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출근길 걱정 대신 침대에서 창문 열고 느긋하게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휴식이 달콤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것 같았다. 느리게 일어나 커피를 내리며 집에서 보내는 편안한 휴가를 시작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대신 휴가 동안 뭘 먹을 건지 정했다. 우선, 해산물을 한 번 먹어야 한다는데 모두가 동의. 여의도 살 때는 수산시장이 가까워 주말에도 종종 해산물을 먹곤 했었는데 아무래도 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 해산물이 상에 오르는 빈도가 줄었다. 얼마 전 크레이피시를 먹었으니 크랩 류 보다는 문어를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남편의 추천으로 양고기 스테이크도 리스트에 올랐다. 양고기 집 가서 먹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술도 한잔 하는 게 좋으니 집에서 도전해보기로! 휴가인 만큼 영양식인 토종닭 백숙은 내가 추천한 메뉴다. 하지만 물에 넣은 닭을 별로 안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닭은 언제든지 기름과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다음은 하고 싶은 일이다. 우선 재봉틀이 놓여있는 작업방 정리를 해야 한다. 책과 원단과 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어 도통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일이 아니라 재미 삼아해 볼 생각이다. 또 봉숭아 물들이기! 이건 휴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쩐지 휴가와 어울린다. 얼마 전에 산 유시민 선생님의 [유럽도시기행] 책도 읽을 생각이다. 휴가지에서 유럽 도시 기행 책을 읽으며 다음 휴가를 꿈꾼다면 더욱 책 읽는 맛이 날 것 같다.



장보고 돌아와 마당에서 어슬렁 거리다 보니 감나무 밑에 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 아직은 푸른 감이니 구제해줄 도리가 없다. 어떤 것은 이미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남편이 말했다. "원래 일찍 열린 감이 일찍 떨어지는 거지..." 무심코 던진 말이었겠지만 문득 세상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래, 난 너무 일찍, 빨리 뭔가 하려고 서둘러 살았어... 그래서 일찍 떨어진 감처럼 충분히 익지를 못했지. 이제는 그러지 말자.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휴가를 시작하며 일상에서 여유를 갖자고 내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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