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선 Jul 29. 2019

산남리의 불금

산남일기 #07

금요일 저녁, 저녁을 마치고 주말을 기다릴 때쯤 산남리의 ‘불금’은 시골스럽게 시작한다. 샐러드에 족발, 혹은 치즈에 바게트, 과일만으로 단출하게 상을 차려도 충분하다. 집에서 담근 매실주와 마트에서 싼 값에 득템 했으나 맛까지 좋아 쏘 굿인 맥주를 가져와 함께 나눈다. 고단했던 한 주를 차곡차곡 개어 넣으며 서로 위로하며, 우쭈쭈 격려하며 웃음을 나눈다.



술 한 잔씩 나누고 나니, 옛날엔 잘 나갔는데..., 요즘 후배들은..., 힘 빼며 목숨 걸고 조직을 위해 일하던 때는 지났다.. 등등 여느 술자리에서나 나올 만한 얘기들이 오간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 살고 있는 선배님들 모두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다.


한 선배가 정리했다.


"우리도 한 때 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었지.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 보며 바람을 쐬는 것이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한 것인지도 알고 있고. 하지만 무작정 오르기만 하는 사람들은 없는 법. 그늘에 쉬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그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인데... 내가 후배들에게 서운한 것은 이미 산을 다 오르고 내려가는 우리들에게 손짓하며 열심히 오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 우리도 죽을 둥 살 둥 일하던 때가 있었고 그 힘이 이 조직의 오늘을 만든 것인데..."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인정하더라도 별로 불쌍하거나 안쓰럽지는 않다. 심학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살면서 이렇게 불금을 편안히 함께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회사원들끼리의 술자리라면 한탄과 자조로 마무리하며 2차를 외쳤겠지만, 짧은 서운함 뒤에는 더욱 풍성한 말거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종으로 심은 상추가 이제 제법 '나무'처럼 자랐다는 것과 한 뼘 만하던 바질이 훌쩍 자라서 수확해서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야겠다는 '뉴스'가 갑갑한 조직 얘기보다는 더욱 신기하고 신난다.


전원마을로 이사하면서 부쩍 손님치레가 잦아졌다. 서울서 일부러 시간 내어 찾아오는 진짜 손님도 있고 이웃 마실도 많아졌다. 생각해보면 도심에 살 때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는 것이 아주 잠깐이라도 부담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 집 가서 밥을 얻어먹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흔하던 집들이도 이젠 자취를 감췄고 집에 초대하는 대신 맛난 식당에서 밥 먹는 게 더 평범한 일이 되었다.


손님 치르는 것, 끼니를 준비해서 나누는 건 조금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잔치상을 차리지 않더라도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쌈 거리를 내고 삼겹살 구우면 풍성해지니 손님 부르는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상추쌈에 삼겹살은 별스러울 것 없으나, '우리 텃밭'에서 키운 쌈채소와 그 맛을 거드는 삼겹살은 특별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매실청 담그는 법을 알려주는 언니이고 불편한 맘을 달래주는 인생 선배이며, 텃밭에서 딴 호박, 고추를 나눠주는 마음이다. 그들로부터 힘을 얻고 각박해졌던 생각 머리를 고쳐 먹는다. 일상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든든하게 버틸 언덕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맘 편한 '친구'를 갖는 것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을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텃밭에 두더지가 나타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