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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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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Nov 14. 2019

수능 날, 아들에게

산남일기 #16

오전 5시 20분. 알람 울리기 10분 전에 눈이 떠졌다. 아, 디데이가 시작되는구나.


아직 잠에서 덜 깬 세포들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느낌만으로도 창문 밖은 추웠다. 해마다 수능날이면 추워지는 '수능 한파'가 올해도 찾아왔다.


아들의 수능날, 지난 일 년 동안 고생한 모든 것을 하루에 다 발산해야 하는 날이다. 이런 날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 밖에 없다. 너무 격하게 격려를 해도, 걱정을 해도, 어떻게 해도 아들에게는 부담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씻어 놓은 쌀을 냉장고에서 꺼내 밥을 했다. 불고기를 굽고 아들이 좋아하는 버섯과 양파를 볶고 밑반찬, 국을 담으면 된다. 밥은 의도했던 것보다 조금 질게 되었다. 불고기 양념은 평소보다 조금 짰다. 굽고 볶는 손길 하나하나가 모두 긴장되었다. 내가 이럴진대 마음 여린 울 아들은 어떠할지...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세월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찬란한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그 ‘내일’은 지독하게 어두운 새벽을 이겨내야만 맞을 수 있다. 내일을 준비한다고 깊은 어둠 속에 뛰어다녀 보았자 기운 빠지고 절망감만 채울 뿐이다. 그럴 땐 얌전히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문제는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밖에 나가 힘든 일 하는 것보다,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들이 뛰어다니는 북새통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있어야 한다는 것은, 한때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젊었을 땐 시간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급함이 나를 옭아매어 뒤척이면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기 일쑤였다.


시간이 상황을 익혀줄 때까지, 따스한 햇빛을 불러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 방법을 익혀나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마음이 여려 자신을 주장하기보다는 주변 상황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데 익숙해진 둘째 아이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지난해 일이다. 큰 반항 없이 사춘기를 보냈던 그로서는 인생 최대의 중대 결심인 셈이었다. 그저 아이가 착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로 인해 스스로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엄마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뒤늦게 대학 진학 후 2년여 동안 아이가 겪었을 갈등과 상처를 알게 되었고 안쓰러웠지만, 내가 해줄 것이 없었다. 그저 다시 시작하겠다고 용기 낸 것에 힘을 실어줄밖에...


고등학교 3년을 공부와 담쌓고 게임 레벨 올리는데 집중하여 지내온지라 다시 수험생이 되어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재수생의 1년은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학원에서 보내니 몸이 힘든 건 당연하고 심리적인 압박감도 상당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집에 있는 일요일 하루 만이라도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엔 배가 아프고 자주 체하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모처럼 공부를 힘들게 했던 부작용이 고스란히 몸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집이 이사를 하고 환경이 바뀌는 어려움 속에서도 차근히 적응을 해나갔다. 더운 여름날 데친 나물처럼 축 쳐져서 들어오는 아이를 보면,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차근이 자신의 길을 걸어서 마침내 마무리 지어야 할 곳에 도착했다. 지난주부터는 급격히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던 아들. 달리 해줄 것이 없어 이번에도 점심 만이라도 좋아하는 것을 준비해 주자는 것으로 응원의 마음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화살은 당겨졌다. 어느 과녁을 맞히든 차분히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아들의 재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교육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거의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이니 나까지 한마디 거들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재수를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매진했던 시간이 아들에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굳게 믿는다. 힘든 날들을 보내면서 마음이 훌쩍 성장했다.


그 아이가, 노력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자신의 인생을 펼치는 출발점을 잘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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