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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Nov 16. 2019

이장님의 퀘스트

산남일기 #17

심학산 자락에 전원주택 100채를 지으려 기획할 때부터 남편은 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집을 짓기 위한 행정절차를 알아보는 일, 건설사 섭외, 기타 주택조합의 대표로 의사 결정하는 일까지를 도맡아 처리하는 데 참여를 한 것이다. 별도의 보상이 주어지는 일은 당연히 아니었고 서로 다른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 걸핏하면 욕을 먹기도 하는 그런 자리였다.


그런 이유로 당시 이 동네 이장이었던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져 이사 온 이후 가끔 길 건너에 있는 '이장님' 댁을 들르곤 했다. 본래 소를 키우시는데 주변에 땅을 가지고 계시다 보니 기본적인 농사도 지으신다.


손바닥만한 텃밭이 있어도 직접 키운 것들을 나눠 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런 고로 이장님은 남편이 가면 꼭 무엇인가를 들려 보내 주셨다. 마치 종가집 큰 형님처럼 말이다.


처음 이사 와서 인사를 갔을 때는 단호박과 옥수수를 얻어왔다. 얻어 온 채소, 과일등은 내게는 ‘퀘스트’ 같았다. 이장님의 시험 문제 - 이 것으로 맛난 음식을 만들어 보시오!



그리하여 단호박을 처음으로 쪄보았다. 옥수수를 집에서 쪄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처음 느껴보는 시골 사는 맛이었다. 밭에서 바로 수확한 채소는 정말 건강한 맛이 있었다.



여름이 한 창일 때 가지가 예쁘게 익었다고 오라고 하셔서 함께 갔다. 밭에 달린 가지를 처음 보았다. 호박잎이며 고추며 깻잎을 한가득 얻어와서 찌고, 볶고 바빴다. 호박잎은 쪄서 쌈 싸먹고 가지는 볶았다. 깻잎은 간장과 고추가루 양념으로 살짝 조렸다. 열심히 시험을 풀고 퀘스트를 실행했다.


가을이 무르익자 추수했다며 햅쌀을 주셨다. 도대체 이장님 댁에 없는 것은 무엇인지. 그래도 이번 문제는 좀 쉬웠다.


얼마 전 남편이 화단에 심어놓은 튤립 덮을 짚단을 얻으러 이장님 댁에 다녀왔다. 짚단과 함께 알타리와 배추, 쪽파를 얻어왔다. 거실에 펼쳐 놓으니 크기가 들쭉날쭉 예쁘게 생긴 알타리가 한가득이다. 그나마도 더 주시려는 것을 마다하고 '조금만' 얻어온 것이라고 했다.


이번 퀘스트는 난이도가 꽤나 높았다. 지난번 우리 텃밭에 심은 파가 너무 예뻐서 얼결에 파김치 한 번 담근 것 말고는 김치라고는 담가본 적도 없는 나에게... 마트에서 파는 단으로 따져도 서너 단은 족히 될 법한 알타리를 어찌하라는 것인지. 저 많은 것을 다 버릴 수는 없는 일. 폭풍 검색으로 알타리 김치를 어찌어찌 담갔다.



보기에는 그럴싸 한데, 맛은 어떨지.. 이러다가 말년에 김장을 하면서 살게 되지는 않을지... 나의 변화무쌍한 삶이 기대가 된다.


다음번에 남편이 이장님 댁을 간다고 하면 따라나서야겠다. 무엇을 가져다가 내게 시험을 치르게 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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