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일기 #25
서울은 익명의 도시다. 반면 '시골'은 누가 누구인지 한 다리 건너면 연결되는 공동체 속성이 남아 있다. 파주시는 인구 40만이 넘는 도시지만, 이곳은 아직도 공동체 의식이 남아있다. 서울서 나고 자란 내게는 낯설지만 기분 좋은 '신기함'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문득,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마트에서 일하는 분들 역시 근처에 사는 주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웃'이라는 느낌. 여의도 살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조금씩 더 친절하다고 느끼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친절한 이웃들 중에서도 특히 이마트 와인코너 훈정 씨는 이제 나의 카톡 친구가 됐다.
와인을 끊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마트 와인코너를 구경 삼아라도 들르게 되는데, 직원들의 추천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와인에 대한 설명이, 뭐랄까 책을 보고 외운 듯했기 때문이다. 속으로 마셔는 봤을까.. 마시고 정말 저렇게 느꼈을까.. 의심을 하다 보니 그 얘기를 신뢰할 수가 없었을 테다.
이사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마트 와인코너를 서성거리고 있는데 훈정 씨가 다가왔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와인을 소개하는데, '어라.. 이 친구 정말 와인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노타쥬 품종으로 만든 남아공 와인을 적극 추천해 줬는데... 가격이 7천 원이라 놀랍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7천 원짜리가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열심히 권하는데, 가격도 좋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병 가져왔다.
마셔보니 놀라웠다. 적어도 그 네, 다섯 배 정도 가격을 받을 만한 맛이었다. 음미하며 마실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모여 유쾌하게 마시기에는 최고의 가성비라 생각됐다. 다음날 이마트로 달려가 10병을 가져왔다. 페북 친구들에게 자랑 + 추천하고 주변에 선물도 많이 했다. Meander가 이마트에서 품절될 때까지 부지런히 사 먹었다.
한 번 놀라운 성공의 경험이 있으니 그 후로 훈정 씨가 추천하는 것은 뭐든 관심을 갖게 됐다. 물론 모두 내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좋았다. 어느 때부턴 가는 카톡으로 추천 와인을 보내준다. 와인 세일즈를 위한 카톡으로 볼 수 있지만 내게는 친구의 추천으로 느껴졌다.
이사 후 많은 이웃과 단골이 생겼다. 일산시장 두부집, 국숫집, 몇몇 식당들 자주 가는 가게들 뿐 아니라 정월대보름이라고 오곡밥을 나눠주는 앞집, 고구마 박스로 사서 나눠주는 선 후배, 이웃들 덕에 서울 촌 놈이 공동체가 살아있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맛을 느끼고 있다.
올해 겨울은 많이 춥지는 않았지만 날이 풀리고 봄기운이 마당에 퍼지니, 몸과 마음이 녹는 기분이다. 꽃이 피면 얼마나 좋을까, 올 해는 텃밭에 무얼 심을까.. 생각만으로도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