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일기 #24
요즘 들어 너무 바빠졌다.
평일 저녁 시간뿐 아니라 주말에도 일에 몰두하느라 집에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주부가 며칠 자리를 비우면 밥 상이 가벼워진다. 밥 해 먹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우리 집 가풍에 맞지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보다 못해 남편이 나섰다.
며칠 전, 해야 할 일을 백팩에 가득 쌓아가지고 거의 파김치가 되어 집에 왔다. 하늘은 이미 어둑해졌고 저녁때를 넘겨가고 있었지만 남편과 아들은 식사를 미룬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근무로 오후 시간 여유가 있는 남편이 저녁을 준비했다. 메뉴는 '연포탕'. 집에 오늘 길에 마포 수산물 시장에 들러 낙지를 사고 슈퍼에서 미나리, 무 등 야채를 준비했다고.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사실, 연포탕은 나도 한 번도 도전하지 못했던 난이도 높은 메뉴였다. 국물을 내고 비린내를 제거하고 해산물 맛을 제대로 내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짜다
식탁에 일회용 버너를 놓고 애벌 끓인 탕에 낙지를 넣어 건져서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낙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른 반찬은 별로 없었지만, 메뉴가 연포탕인데...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었다.
살짝 익은 낙지를 먹었다. 상당히 간이 배어 있었다. 낙지가 짰다. 설명을 들으니 낙지를 씻을 때 왕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던 모양이다. 국물은 솔직히 실패였다. 짜기는 했지만 낙지는 먹을 만했다.
맑은 연포탕 국물을 만들지 못한 데다 낙지가 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셰프는 절망했다. 하지만, 고객인 나와 아들은 열심히, 맛있게 먹었다.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에서 먹는 저녁은, 집밥이라는 것만으로도 반찬이 충분히 되었다.
#달다
사실 '시장이 반찬'이 아니더라도, 저녁은 충분히 달았다. 시간을 내어 레시피 검색하고 정성스레 장을 보아 만든 저녁상이 어떻게 달지 않을 수 있을는지. 게다가 막히는 퇴근길을 뚫고 집으로 오는 나를 기다려 준 가족과 함께이니 말이다.
#씁쓸하다
연포탕이 기대만 못해서 남편은 씁쓸해했다. 나는 일이 바빠 저녁을 제대로 못해준 것이 미안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일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니 크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세대라서 그런가 보다. 주말에 밑반찬으로 냉장고를 채워놓아야 한다는 강박이 아직도 남아있다. 맛있는 것 만들어 가족들을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도 아직 상당하다.
연포탕 실패기만 적는다면 남편은 무척 서운하고 억울할 것이다. 남편은 요리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틈나는 대로 만들어 보려 애쓰는 편이다. 얼마 전 근무시간이 바뀐 이 후 오후에 여유가 생겨서, 덧붙여 내가 좀 더 바빠져서, 요리 실습을 더욱 많이 하게 됐다. 최근 만든 것 중에 백종원 레시피로 만든 삼겹살 파무침은 우리 아들의 선호 메뉴가 되었고 버섯을 된장과 볶아서 만드는 된장찌개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다. 아귀찜과 아구 수육도 만들어 보았고, 스테이크를 굽기도 했다.
우리 집은 (아쉽게도) 나 빼고 모두 남자다. 난 오래전부터 아들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큰 아이는 실패했고 (하지만 이제 내 의무 영역에서는 벗어났다^^), 둘째는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자신의 한 끼를 준비할 정도는 된다. 남편도 동년배 중에서는 꽤 요리에 관심 있는 편이다.
바빠져서 음식 만들 시간이 없다는 것에 슬퍼할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들의 요리 솜씨 향상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