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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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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Jan 05. 2020

훌라 나잇

산남일기 #23

2004년에 우리 가족 모두가 LA에서 1년간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나는 유학 중이었고 남편은 회사에서 연수 기회를 받아 아이들과 함께 왔다. 1년간 아이들과 함께 무조건 원 없이 노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나 또한 일이 있어서 ‘미국 일주 여행’과 같은 과감한 놀이 프로젝트를 하지는 못했다. 다만 자주 가능한 반경 내에서 여행을 다녔고 저녁이면 늘 가족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했다.


지내놓고 나니 그때 비록 무척 곤궁하게 살았지만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사업하는 엄마에 기자 아빠 - 서울에 있을 땐 주말을 빼고 온 가족이 저녁 먹는 것이 쉽지 않았고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아이들에게는 불량 엄마 아빠였을 테다. 처음으로 가족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때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카드게임이었다. 아이들에게 포커를 가르쳤고 종종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에게는 형과 엄마, 아빠와 겨루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실 가장 게임에 몰입했던 건 그 아이였다.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 표정이 변하는 것이 귀여워, 놀리기도 하고 응원도 했다. 어느 날인가 타겟(Target) 마트에서 카지노 칩 (물론 모형이지만)을 팔길래 망설임 없이 샀다.  그 후론 제법 카드 치는 맛이 났다. LA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짐을 싸면서도 결코 버릴 수 없어 고이 모셔온 카지노 칩이 아직도 우리 집 보물로 남아 있다.



지난 연말, 조만간 호주로 떠날 큰 아이 부부가 집에 와서 며칠 머무르면서 정말로 오랜만에 가족 카드 게임 판을 벌였다. 이번에는 종목이 ‘훌라’였다. 포커는 왠지 ‘꾼’들의 게임인 것처럼 느껴져 종목을 바꿨다. 7장의 패를 나눠 갖고 같은 숫자이거나 같은 무늬 연속 숫자 3장을 모으면 패를 내려놓을 수 있고 (7은 한 장만으로 가능) 가장 먼저 손에 있는 패를 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승자가 결정됐을 때 각자 손에 가진 카드 개수만큼 벌점이 매겨진다. 벌점 1점당 100원으로 정해 놓았다. 처음에 5천 원만큼의 칩을 바꿔 게임을 하고 나중에 정산을 한다.



시골 마을, 저녁을 먹고는 특별히 할 일이 마땅치 않아 지난 연말부터 틈나는 대로 훌라 게임을 했다. 남편과 (둘째) 아들, 나 이렇게 셋이서 치면 각자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셋 중에 고수는 단연 아들이다. 가장 훌라를 많이 하고, 가장 카드 계산을 정확하게 한다.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심리 분석도 가장 성실하게 한다. 그래서 승률이 50%가 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 아빠가 견제를 하게 되는데 (물론 말로만) 그런 걸 몹시 부담스러워하는 초 울트라 섬세 감성을 가졌다. 아들이 과연 무엇을 들고 그렇게 끙끙거리는지 짐작해보는 것이 훌라 게임의 즐거움 중 하나다.


남편은, 비유를 하자면 영화 [타짜]에 나오는 고광렬 같은 인물이다. 말로 상대의 심기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특기다. 어려서부터 당구, 바둑, 장기, 고스톱 등등 잡기에 능하고 강한 편이라 웬만해서는 잃지 않는다는 것이 본인의 믿음이자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최근 가족 게임에서의 전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남편은 이를 “돈을 잃고 인심을 얻는 전략”이라고 표현한다. 하긴 가족끼리 치는 5천 원 내기 훌라에서 아득바득 돈을 따려고 덤빌 이유는 없다.


나는 뭔 전형적으로 ‘노알못’이다. 때로 뻥카나 포커페이스가 중요하다지만 그런 거 따지지 않는다. 훌라를 해보겠다고 7을 내놓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대담함과 끈기도 없고 카드 계산도 안 하니 전형적인 초짜의 카드를 친다. 그리고 패가 좋아 스톱을 할 것도 아니면서 항상 손에 쥔 에이스를 버리지 못한다. 왜? 그냥. 에이스가 좋은 카드이니까! (아, 이런 단순 무식...) 이러하니 가족들 중에서 가장 승률이 낮지만, 또 신기하게도 크게 잃지도 않는다. 간혹 훌라도 하고 또 어찌어찌 따기도 하니 말이다.


판돈 15,000원으로 한두 시간 즐겁게 놀 수 있어서 훌라 나잇은 우리 가족의 놀이로 자리 잡았는데, 이 와중에 의문의 1패는 카카오페이. 게임이 끝나면 각자 칩을 정산해서 잃고 딴 금액만큼 카카오페이로 보내준다. 물론 우리는 무료로 사용하고 있지만, 카카오페이의 리소스를 쓰는 것이니... 누군가 우리 가족의 카카오페이로 주고받은 내역을 보게 된다면 왜 이 가족이 지속적으로 2,300원, 3,900원 등등의 금액을 서로에게 주고받는 것인지 궁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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