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을 과감하게 접고 '조직'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월급쟁이로 돌아 온 소감을 묻는다. 96년에 한국일보를 그만 두고 창업을 했으니 이십여년 동안 월급을 주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그 사이 학생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기도 했고 몇 달 월급사장을 하기도 했지만 '사장'으로 지낸 세월이 얼추 이십년에 가깝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놀랍다. 어쨌든 월급 못 준 적 없고 (설사 내 월급을 못받았을 지언정..ㅠㅠ) 함께 일하기 시작했던 때보다 성장한 모습으로 회사를 나가 창업한 인재들도 여럿 배출했으니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성공하지 못했지만 스스로를 위로할 만큼은 해내었다 싶다.
남들은 언젠가는 월급쟁이 때려치고 창업을 꿈꾸지만 난 이제 몇 번의 창업을 접고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왔으니 역주행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창업의 열기와 에너지를 흠뻑 느끼고 있다.
내가 이 자리를 택한 건 단순하다.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젊다는 건 반드시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겠지만...) 성장과 발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는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창업생태계는 발전하고 확장하고 있다. 이십여년전 처음 '벤처' 열풍이 불었던 때를 연상시킨다. 창업 생태계를 키워낼 수 있는 자원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중요한 것은 돈이다. 스타트업 아이디어에 지원할 엔젤, 액셀러레이터의 투자가 활성화되고 그 투자가 회수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 흐름은 다행히 훨씬 더 정돈되고 다듬어지고 있다.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며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농부들(창업가)도 많아지고 있다. 나는 약간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땅을 분석하고 그 땅에 재배하면 좋을 품종을 찾아내고 더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농부들과 함께 뛰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영농지도사라고나 할까, 마을에 경험많은 농부라고나 할까...
오즈 인큐베이션 센터에 입주한 팀들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마음이 없다면 고단하기만 하고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그 열매를 직접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자칫 공허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 일이 재밌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함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어쨌든 사장에서 월급쟁이로 회귀하여 한 달을 지낸 소감을 몇가지 정리해보자면
- 월급 걱정 안해도 된다는 것, 월급을 주기 위해 해야하는 일들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홀가분하다. 난 사장 체질이 아니었나 보다. 이 사실을 이십년 만에 발견하다니... 슬픈 일이다.
- 시간이 많아졌다. 판교-여의도 출퇴근 길이 멀어도 집에 오면 식당 문을 닫고 퇴근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하루를 정리할 수 있다. 드디어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았다.
- 저녁 시간에 모임에도 참가하고 친구들 만나 수다도 떨고 심지어 책읽을 시간도 생겼다. 선물같은 시간들이다. 없다가 생기니 그 소중함을 알겠다.
- 공부할 것이 많아졌다. 예전 '벤처'는 IT 기술을 이해하는 것이 큰 숙제였으나 이제 어느 정도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다. 식음료, 인테리어, 자동차 등등 곳곳에서 창업 아이템들이 모아지고 있으니 이해해야하는 분야가 너무 많아졌다. 게다가 여전히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블록체인이니 AI니 '문송'에겐 너무 어려운 영역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두통이 다시 생겼다.
- 달력을 뒤지다 만난 빨간 날들을 부담없이 반가워할 수 있게 됐다.
- 창업해보면 좋을 아이템들이 머리 속에서 늘어났다. 이런 데 관심있는 팀이 있다면 함께 발전시켜보고 싶은데... (아, 이런 미련한...)
- 운동이든 여행이든 좀 더 잘 쉬는 방법을 찾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