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에서 배워야 할 것
2박 3일 다녀온 게 전부인데 너무 호들갑 떨며 심천 얘기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게는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지난해 상해 다녀온 이후 이미 중국이 예전에 알던 중국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심천은 젊은 에너지가 넘치는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느껴졌다. 이십여 년 전 실리콘 밸리 출장에서 느꼈던 새로움과 부러움을 느꼈다고나 할까.
심천은 '세계의 공장'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최고의 하드웨어 기업 중 하나인 애플 제품이 심천 폭스콘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글로벌 IT 기업들이 모여있다. made in china가 저가의 짝퉁 제품 이미지를 벗고 최첨단의 하드웨어가 탄생하는 요람으로 변모하는 흐름에 심천이 중심에 있다.
80년대만 해도 심천은 인구 30만 정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인구 1천3백만이 넘는 대도시이자 새로운 기술로 세계를 이끄는 글로벌 시티로 성장했다.
서울은 한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1월 심천의 날씨는 늦가을, 선선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이 반겨주는, 최고의 환경을 선사했다.
도착해서 바로 HAX (위키피디아 설명)로 향했다. 심천, 화창베이에 자리 잡고 있는 HAX는 실리콘밸리의 SOSV의 펀드로 운영되는 하드웨어 전문 액셀러레이터로 실리콘밸리-심천 간 독특한 협업 모델을 정착시킨 액셀러레이터로 유명하다.
미국 실리콘 밸리는 스타트업 문명의 발상지이자 투자 환경이 잘 정착된 곳이지만 스타트업이 하드웨어 제품을 만들어 보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해전부터 사물인터넷(IoT), 헬스케어 등 다양한 영역의 스타트업 아이디어들이 탄생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스마트" 하드웨어에 대한 필요가 늘어났다. 반면 중국 심천은 수십 년간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제품 생산의 기술과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워킹샘플을 만들고 디자인을 발전시키며 프로토타입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기에 최적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실리콘 밸리의 아이디어 (하드웨어 제품 생산에 대한)를 심천에서 제품화시키고 생산 체계를 갖추는 협업의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HAX가 워낙 유명한 하드웨어 액셀러레이터로 자리 잡았지만 심천에는 비슷한 모델로 스타트업을 키우는 액셀러레이터가 다수 자리 잡고 있다고 들었다.
HAX는 매 기수마다 15개 팀을 선정해서 2만5천달러 (약 3천만 원)를 투자하고 지분 12% 내외를 갖는다고 한다. 올해부터는 정기적으로 모집했던 기수(batch)의 개념을 없애고 매달 모집 체계로 새롭게 운영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도 HAX 프로그램에 뽑혔던 팀이 있었다. 아시아의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더 많은 국내 업체들이 이런 기회를 두드려 보았으면 한다.
HAX와 같은 프로그램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심천에 스타트업을 위한 '생태계'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 이번 출장에서 만난 SZOIL (Shenzhen Open Innobation Lab) David Li는 심천에서 하드웨어 사업을 해보고 싶다면 "아이디어를 정리한 문서 한 장만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산업 디자인 전문가-소규모 프로토타입이 가능한 공작소-초기 마케팅 전문가-투자자 등이 단계별로 함께 일하며 시장 (소비자) 반응을 봐가며 다음 단계를 논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많은 경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이미 심천에 나와있는 제품일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경우는 디자인과 레이블을 바꿔 손쉽게 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장기간 중 x-factory, World Maker Group을 돌아보았는데 어디나 모니터에는 디자인 화면이 띄워져 있었고 벽면에는 공구와 부품이 걸려 있고 3D 프린터도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공장"이자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심장부"임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는 곳마다 친절했고, 자신들의 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영어를 능숙하게 잘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심천 하드웨어 생태계 관계자들은 한국은 제조업의 품질이 뛰어난 곳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제조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삼성, LG 등 전자제품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지만 스타트업에게 하드웨어 제조는 너무 어렵고 힘이 드는 영역인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센터에 입주한 팀들 얼굴에 드리운 근심의 그림자로 느낄 수 있으니까.
몇 개 기업과 미팅을 마치고 화창베이 상가를 둘러보았다. 화창베이는 우리나라 60, 70년대 세운상가, 90년대 이후 용산 전자상가와 같은 공간이다. 물론 규모면에서는 수십 배 이상이겠지만. 오래전에 전자신문 기자를 했던 지라 전자상가의 풍경은 익숙하다. 그곳을 기반으로 성장한 부품업체, 컴퓨터 업체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IT 강국의 싹을 틔웠었다. 화창베이 상가에서 중국 1위 휴대전화 업체라는 OPPO 매장에서 폰을 만져보고는 깜짝 놀랐다. 디자인도 예쁘고 가볍고 가격도 싸고... 이제까지 샤오미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놀랄만한 경험이었다.
우리의 전자상가가 융성하던 시절, 우리도 전자제품은 역시 일본이야.. 라며 일본을 목표 삼아 열심히 뛰었다. 심천 화창베이에서 우리를 향해 바짝 추격하고 있는 그들을 느꼈다. 아니, 벌써 앞지르기 시작한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심천과 어떻게 손을 잡을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