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ㄹ) 것 같다"

'나만 옳다'가 아닌, 나와 당신을 잇는 열린 문법


“비가 올 것 같아요”

“도서관에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을(ㄹ) 것 같다] 문법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 ‘추측’의 의미로 쓰임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문법은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때’도 쓰인다.

“오늘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다음에 만나요.”

“죄송하지만 그 부탁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문법 하나가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면, 대학교 어학당에서는 학생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충분한 간격을 두고 가르친다. 중간 학기에서는 ‘추측’ 용법만 가르치고 학생들이 연습을 통해 ‘추측 상황’에서의 사용이 익숙해지면 기말 학기는 ‘거절 상황’에서의 용법을 가르치는 식이다. 어떤 용법을 먼저 가르칠지는 대학교마다 다르다. 학생이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할 때 어느 상황에 더 많이 부닥칠지에 따라 문법의 중요도가 나뉘는데 각 어학당 교수님들의 판단과 숙고 끝에 교재가 편찬된다.


그렇다면 나처럼 1대1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프리랜서 강사는 어떤 용법을 먼저 가르칠까? 내 수업은 ‘과외’이므로 학생의 개별 수준에 따라서 한꺼번에 가르치기도, 나눠서 가르치기도 한다. 언어는 ‘공부’가 아니라 ‘삶’이므로 정답이 없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자’이면서 외국인 친구가 빨리 한국어를 잘 구사하기를 바라는 ‘한국인 친구’로서, 그의 ‘삶’에 한국어라는 언어가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간혹 몇몇 외국인 학생은 거절을 표현할 때도 [-을(ㄹ) 것 같다] 문법을 쓰는 이유가 궁금해 묻는다.

“'못 만나요'라고 하면 되는데, 왜 '못 만날 것 같아요'라고 말해요?"

"왜 이미 거절이 확실한 상황에서 '부탁을 못 들어줘요'가 아니라 '부탁을 못 들어줄 것 같아요'를 사용해요?"

그러면 나는 이 문법이 이렇게 쓰이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한국 사람들은 거절할 때 상대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서 돌려 말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친구 어머니께서 맛있는 요리를 가득 해주셨는데 너무 배가 불러 못 먹는 상황이라면 “못 먹어요”라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것보다 “배가 불러서 못 먹을 것 같아요”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 훨씬 부드럽게 전달된다는 식으로. 그러면 외국인 친구들은 놀라워하며 말한다.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것을 생각해서 돌려 말한다니!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네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요새 인터넷 기사 댓글을 도배하는 납작한 언어들과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의 언어 습관 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상대의 복잡한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비수같이 마구 쏟아내는 납작한 말들.


[-을(ㄹ) 것 같다]는 ‘추측’과 ‘거절’을 넘어, 한국인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도 많이 쓴다. 이때 이 문법은 ‘내 말이 확실하다’는 ‘닫힌 태도’가 아니라, ‘내 말은 내 상황에서는 맞지만, 너의 상황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를 내포하는 ‘확신하지 않는 열린 문법’이다.

“나는 다이어트할 때 운동보다 식단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생각이 전부 다르고 정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내 말이 확실하다’는 ‘닫힌 문법’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존중해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 열린 문법’, [-을(ㄹ) 것 같다]를 쓴다.


그 밖에도 [-을(ㄹ) 것 같다] 문법은, 친구나 가족이 고민을 토로하거나 힘든 일을 털어놓았을 때 ‘네 말에 공감한다’는 표현으로 많이 쓴다. “요새 팀장님이 자꾸 무리한 일을 시켜서 밥도 못 먹고 야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애인이 이해는 못해주고 외롭다고 서운함을 토로하지 뭐야”라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네가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비슷한 용법으로 선어말어미 문법인 [-겠-]도 있다. “네가 정말 힘들었겠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는 어떤가? 나의 언어는 어떤가?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는 상대의 복잡한 상황을 헤아리고, ‘내 생각은 이렇지만 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존중의 표시로 ‘열린 문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내 말만 옳다는, 너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닫힌 문법’으로 마침표를 찍는가.


최근에 본 한국의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이 떠오른다. 얼마 전, 쿠팡의 새벽 배송 기사님과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이 과로사로 또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 싫을 정도로 매우 납작했다. 한쪽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새벽 배송을 없애자’, 다른 한쪽에서는 ‘생계 때문에 새벽 배송 일도 간절한 사람들이 있는데 너네야말로 일자리를 없애서 사람을 더 죽일 셈이냐’로 나뉘었다. 두 댓글 모두 납작하다. 이미 ‘확신’에 차서 ‘닫힌’ 결론을 내버린 두 댓글은 서로를 존중하지도, 소통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두 의견이 나오게 된 배경에 엄청난 맥락의 실종이 있음에도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소통의 공간이 없다. 정작 기사의 논점은 새벽 배송을 없애냐 마냐도 아니었다. 몇 년째 사람이 죽는데도 노동 환경을 개선할 생각이 없는 쿠팡의 행태를 꼬집고 쿠팡의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쿠팡’이라는 기업에 있다. ‘새벽 배송’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쿠팡이 처음부터 수익이 아닌, 사람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기업이었다면 ‘일하다가 죽을 수 있는’ 노동 환경에 값싸게 사람을 부리지도,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꾸 죽어나가지 않았다면 새벽 배송은 지금처럼 문제 될 일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왜 댓글에서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 방법’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납작한 언어들로, ‘쿠팡’이 아닌 서로를 힐난하며 싸우는 것일까?


현재 온라인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언어의 문제점은 '지나친 자기 확신의 닫힌 언어'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에 있다. 누군가 처음부터 지나친 확신에 차서 '닫힌 문법'을 사용하면 대꾸할 의욕이 사라진다. 어쩔 땐 화가 나서 당장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 납작하게 대꾸하고 싶어진다. 이런 언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비방으로 이어지기만 할 뿐 복잡한 세계와 사람을 헤아리고 탐구하지도 못하며 근본적인 해결책에 다가가지 못한다.


또 다른 기사의 댓글을 살펴보자. 올해 8월, 전남 나주의 벽돌공장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스리랑카 출신의 외국인 근로자를 지게차에 묶어 공중에 올리는 인권 유린의 영상이 퍼져 논란이 일었었다. 한국이 이주노동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깔보는 시선, 혐오와 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끄러운 기사였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은 어땠을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부끄럽다’, ‘외국인 노동자 분, 대신 죄송합니다. 좋은 분들이 계시는 다른 직장도 있습니다! 꼭 재취업하세요!’라는 한국사회의 반성과 응원의 댓글도 있는 반면에 기사의 논점에서 완전히 벗어난 댓글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데 쟤네, 힘든 일 하라고 비자 줘서 데리고 왔더니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돈만 받는다던데?’, ‘공장일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다른 곳으로 안 옮겨주면 튄다던데?’, ‘불법 체류 문제는 해결되고 있는 건가?’ 외국인 근로자가 인권 유린을 당했다는 기사에 인권 유린의 댓글을 남긴다. 이주 노동자가 한국에서 겪는 온갖 차별을 알리는 기사에는 이주 노동자가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역차별’을 운운한다. 이러한 댓글에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차별과 혐오 없이 모두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고민해 보겠다는 의지도, 해결책을 찾고 싶다는 ‘빈말’도 보이지 않는다.


한 때 SNS에서 요즘 아이들이 자기 확신이 없는 ‘-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문법을 너무 남발한다는 비판이 돌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을 결정해 주니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서도 뚜렷한 자기 의사와 확신이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생각을 해본다. 혹시 어른들이 지나친 자기 확신의 언어로 아이들의 말을 눌러왔기 때문에 아이들이 점점 더 조심스러운, 자기 확신 없는 언어를 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나이를 먹고 개인적 삶이 축적될수록 내 생각과 말에 고집이 있는 것을 느낀다. 나도 아주 자주, 내 의견만 옳다는 ‘닫힌 언어’를 쓴다. 그래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이 문법을 가르칠 때마다 내 삶의 언어를 되돌아본다. ‘자기 확신에 찬 닫힌 언어'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고, 문제 많은 이 세상에서 다른 이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탐구하는 걸 방해한다. 여러분의 삶의 언어는 어떤가?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고민하기 위해 ‘열린 소통의 문법’을 쓰는가, 귀를 닫고 내 목소리만 내겠다는 고집 센 ‘닫힌 문법’으로 마침표를 찍는가?


“당신의 처지도 이해할 것 같다”

“힘들었겠다”

“내 생각도 하나의 의견이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 같이 차분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분명 해결책이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나와 당신의 소통을 연결하는,
세상과 진실한 관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을(ㄹ) 것 같다] 열린 문법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대화의 여지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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