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유리 동물원 - 테네시 윌리엄스
역시 남의 집 막장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우리나라가 유독 막장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원조 맛집은 미국이었나 보다, 아니면 인간은 다 그저 그렇게, 웃프게 살아가는지도.
파우스트에 덴 후에 희극은 웬만하면 읽지 않으려 했건만, 아무거나 잘 먹는 착한 독자가 되기 위해 책을 폈다. 무대 세팅과 부연 설명 등 집중 안 되는 문장들은 대충 넘기고 인물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책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됐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대농장을 소유한 할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각 인물들의 대화에서 뿜어지는 심리 묘사와 각자의 욕망은 단순한 유산 다툼에서 인간의 허위의식과 삶의 공허함이라는 깊은 주제를 길어 올린다.
스스로를 고양이라 지칭하는 마거리트, 그녀는 남부 지방의 몰락한 가문의 아름다운 딸로 허영과 물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와 결혼한 브릭은 은퇴한 미식축구 선수로 알코올 중독자다. 임신을 해서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그녀의 속도 모른 채 거의 모든 말에 대꾸하지 않거나, 오히려 냉소를 보냄으로써 그녀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만든다. 극의 하이라이트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그는 절친한 친구의 자살로 인해 술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죽음의 원인이라 여기는 아내 마거리트를 증오한다.
할아버지와 아들 브릭의 대화로 이루어진 2막은 이 희곡의 대미이다. 부잣집의 유산 상속 다툼이라는 지겨운 이야기를 몇 차원 깊게 만들어준다.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간격이란 얼마나 먼 것인가에 대해, 술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는 아들 브릭과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아버지 폴리트의 따뜻하고도 상스러운 시도는 두 캐릭터를 꽤 매력적으로 만든다.
뛰어난 용모와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브릭, 그와 같은 완벽해 보이는 인간이 타인의 눈에 동성애자로 비치는 것은 그에겐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스스로 인정하지 못해 스키퍼의 죽음을 부른 그는 모든 책임을 매기에게 돌리며 술로서 끔찍한 현실을 도피한다. 불편한 현재의 순간을 도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이 틀에 맞춰져 있다. 아무리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허영과 돈에 대한 집착은 멈출 수 없다. 이것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한 미국 자본주의 풍토과 맞물려있다.
작가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유리 동물원> 또한 같은 주제 의식을 내포한다. 도망간 남편, 왕년에 잘 나갔던 엄마 어맨다,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딸 로라, 실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창고에서 일하는 톰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가족을 그대로 투영한 듯 보인다.
그토록 엄마가 바라는 ‘신사 방문객’이 로라와 사랑에 빠져 가족들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을까, 광적으로 자식에 집착하는 엄마와 자폐증세와 절름발이인 누나를 둔 톰은 창고에 숨어서 시를 쓰고, 매일 영화관으로 나간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이자 잠시나마 꿈을 꿀 수 있는 안식처이다. 하지만 그 꿈은 신기루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사라질 뿐이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자 희망이다. 하지만 가끔은 뒤돌아보자. 내가 딛고 있는 곳이 뜨거운 양철판인지, 서늘한 그늘인지.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대사가 또 떠오른다. 같은 주제로 현실적인 버전,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