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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Dec 30. 2020

채워야만 비울 수 있다

<금수> - 미야모토 테루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책도 영화도 더 많이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몸은 침대를 벗어나기 더욱 힘들어졌고, 했던 게임을 다시 부여잡고 있거나, 입을 일도 잘 없을 것 같은 옷들을 장바구니에 넣고 있다. 나는 책과 영화만 있으면 몇 날 며칠을 집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들을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여가시간을 이것들과 보내는 것을 누구보다 즐기는 줄 알았는데 요즘 이에 대한 의문이 든다. 쉼 없이 읽고 봐도 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모니터 앞 깜빡이는 커서가 가끔 너무 크게 보인다. 읽고 봤으니 뭐라도 써야 되지 않아? 머릿속에 또 다른 나의 재촉에 질려버렸다. 잔소리에 귀를 닫고 인상을 팍 쓴 채 주변에 눈을 돌려본다. 세상 사람들 사는 얘기, 뉴스, 정치, 연예, 몇십 분을 인터넷 속에서 표류하다 보면 이내 금세 질린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걱정, 분노, 기만과 위선, 비교 우위, 그리고 가장 꼴 보기 싫은 광고 더미 들을 보고 있자면 또 두통이 생긴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시 책을 펼친다. 활자를 눈으로 잡아 뇌에 넣어 마음속으로 꺼낸다. 몇 시간 동안 반복하다 보면 이야기에 몰입된다. 이야기가 아닌 책은 도통 읽기가 힘들어졌다. 에세이나 사회 과학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내 손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흥미 없는 뜬구름 이론에 대한 줄줄 설명은 수학의 정석 이후로 때려 친지 오래니까. 좋은 것만 보고 가자. 인생은 짧고 즐길 거리는 너무 많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이 일 년째 5 챕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는 남녀의 이별 얘기다. 남편의 외도로 깨진 가정, 10년 후의 우연한 만남은 놀라움과 동시에 모래를 삼킨 듯한 매스꺼움만 남겼다. 그 찝찝함을 떨치기 위해 참지 못하고 써낸 편지를 시작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감성적이면서 자조적 시선이 담긴 과거에 부부였던 남녀의 편지는 오고 갈수록 서로에게 가리어져 있던 자욱한 그림자를 걷어낸다.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살아가던 아키는 아리마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를 동정하게 된다. 공허한 마음을 채움으로써 비로소 버릴 수 있게, 응어리진 애증의 감정을 흩뿌릴 수 있게 됐다. 아리마 역시 그 사건 이후 전락했다고 자조하는 구차해진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다 쏟아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으면서 이윽고 아키의 계속되는 편지에 조심스레 과거의 고백을 털어낸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를 향한 사죄와 죄책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한 발을 내딘 것처럼 보인다.


마음에 생긴 구멍을 채움으로써 비로소 비워낼 수 있다는 거, 지금은 피식 웃어넘길 수 있는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이별, 귀하의 역량은 충분하였으나로 시작되는 메일, 술과 돈으로 얼룩진 남보다 못한 친척 관계. 자신을 괴롭히는 수많은 이유를 생산해가며 자책했던 지질한 나의 과거. 어찌 됐든, 내 뒤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것들이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다. 그것들을 극복했던, 여태 괴로워하던, 중요한 것은 당시의 구멍은 메워졌다는 거고 그 위에 지금의 나를 쌓아냈다는 거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이 살면서 생기는 수많은 구멍을 채우고 비워내고 다시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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