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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Jan 17. 2021

가벼움과 무거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선형적 구조의 시간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 니체의 영원회귀란 개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쿤데라는 키치라는 단어를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 이를테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줄을 타는 인간들의 생애를 보여주며 마치 거울처럼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선과 악, 젊음과 늙음,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 가벼움과 무거움, 예쁘게 반으로 갈라 빚어놓은 세상 속에서 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짧은 생을 불태우는 나방처럼. 거대한 시소처럼 양 극단 사이를 영원히 왔다 갔다 하다 끝나는 네 남녀의 삶은 경주마처럼 죽어라 한 방향을 향해 달리고 난 후에 자신이 걸어온 길 뒤에 무언가를 꽤 많이 남겨두고 온 것이 아닌가 회고하게 한다. 쿤데라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단어인 키치는 언뜻 읽어보면 어려운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처음 읽을 땐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어디 가서 책 좀 읽었다고 잰 채 할법한 문장으로 느껴진다.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요약해보자면 단어의 본질 자체가 아닌 인간이 덧씌운 하나의 이미지를 이용한 판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성을 거세하고 남은 감성만의 판단.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의 퓨전. 그의 다른 소설 <불멸>에서는 이 개념을 좀 더 구체화한 ‘이마올로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루와 일주일, 그리고 일 년, 매번 다시 회귀하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지만 크게 보면 인간은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길 원한다.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인간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트레일러를 계속 달리게끔 설계되어있는 세상에선 더욱.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느 것이 선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들이대는 순간 그 의미는 깃털처럼 가벼워져 금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테레자 없이 살 수 없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의미를 찾아 수많은 여자들에게로 눈을 돌린 토마시, 역시 그를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로워한 테레자. 토마시가 늙고 힘들어서 더 이상 여자를 탐할 수 없게 되길 바랬으면서 막상 그 순간이 닥치고 나니 자신이 그를 전락시킨게 아닌가?라는 제3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은 특히 재미있게도 비포 시리즈 3부작의 제시와 셀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운명적 사랑을 겪은 두 남녀에게 조차 좁힐 수 없는 간격은 존재한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너무나 멀어 보이지는 서로의 거리. 비엔나와 파리에서의 청춘은 사라진지 오래다. 배가 나오고 주름진 얼굴은 각자의 세계만 단단하게 만들고 상대와의 통로는 쥐구멍처럼 좁아보인다. 하지만 결국 다시 서로를 향하는 서로의 시선. 이 유머러스하면서도 다소 철학적인 이 씬은 내 머릿속에 아주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렇다면 가벼움에 자신의 삶을 맡긴 사비나가 최선일까? 미국으로 넘어가 오직 자신만의 삶을 좇은 그녀의 삶이 나머지 셋의 생에 비해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가벼움이라는 껍질 속에 자신만의 낯선 세계를 남겨놓은, 토마시와 테레자의 부고를 듣고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을 그녀의 모습은 다소 황량해 보인다. 거의 전 생애를 그녀를 향한 숭배로 보낸 프란츠는 반대로 무거움에 과하게 몰입한 듯하다. 오직 사비나만이 자신이 희구하는 가치라 여겼던 그가 그녀가 떠난 후에 오히려 답을 얻는다. 대장정이라는 자신의 일생 목표에서 사비나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허무한 최후를 맞는다.


그럼 이토록 지난한 삶을 무엇에 의탁해 살아가야 하는가? 뭐 어쩌라는 거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 답은 없다. 언제나 소설에는 답이 없다. 쿤데라는 어느 것 하나가 절대 선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무의미의 축제를 즐기듯이 어제는 디오니소스의 삶을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아폴론의 삶으로 변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저울 양 끝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는 것. 키치에 매몰된 삶을 지양하는 것만이 비극을 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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