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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Feb 15. 2021

순환과 반복, 불완전한 삶에 대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이해, 평생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질문에 쫓기거나, 어느 순간 망각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는, 권태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늘 허우적댄다. 올해는 이루겠다는 소원을 적고 이 달의 목표를 세우고, 하루의 다짐을 되새기지만 지독한 일상은 이내 그것들을 잘게 부수어 흩뿌린다. 날리는 조각들에 덜컥 조바심이들어 허겁지겁 주워 담아 글로 벼려낸다. 쓰기 위해 앉아 다시 생각을 다듬다 보면 가끔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종종 놀란다.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가 바라는 틀에 맞춰진 행동 양식의 답을 도출할 때면 끈적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깨닫는다. 매일 하늘의 이상을 쳐다보지만 발목에 붙들린 욕망과 실수라는 족쇄는 다시금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는 이해의 방식을 만들고 대입하는지도 모르겠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 최근 그것을 대체한 것 같아 보이는 MBTI 같이 사람을 적당하고 알맞게 포장하고 규정짓고 구분한다. 이런 행위를 한 때 극도로 혐오했다. 편협한 시각, 우물 속 개구리 같은 시선이라 예단했었다. 근데 요즘엔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저런 방식이 안개 같이 자욱한 두려운 삶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이정표를 세워 의지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져서일까. 종종 들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와 상식에서 벗어난 선과 악의 모호한 결과는 의도치 않게 부여된 이 생을 어찌 버텨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코엔 형제의 영화들처럼 불확실한 행운과 거대한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은 명쾌하게 설명될 수도 할 수도 없는 모호함이다. 하지만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답을 내놓아야 한다. 아니면 모른 채 망각의 껍데기를 걸친 채 망령으로 살거나. 그래서 이런 이정표 조차 없다면 세상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공포일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조직에 속한 인간으로, 사회가 만든 성격, 특성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한없이 무가치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두려움에 압도된 발을 떼어내기 위해선 어떤 것이든지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


내게 있어 그것은 영화와 책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삶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들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소용없다고 여겼던 그것들이 어느 순간 내 앞에 거대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인간관계에 질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려 애써 발악했었다. 하지만 결국 내 안에 깊은 구멍은 옆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 의해 치유되고 있었다. 돈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요즘은 열심히 경제 관련 공부를 하고 미래를 위해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예전보다 확연히 줄었다. 대신 내 주변 소중한 이들과 사소한 이야기,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이 늘었다. 


예전 독서모임에서 자기 계발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태극과 음양에 빗댄적이 있다.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새 나에게 필요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더라고, 실패한 사업가가 자기 계발서를 읽고 반등할 기회를 얻기도 하고, 무력감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에게 커다란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한 연애에 실패한 사람이 어떤 소설로 인해 다시 살아갈 의미를 찾기도 한다. 어떤 것도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선과 악, 종교와 예술, 무거움과 가벼움, 사상과 행동, 이성과 감성, 특정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처럼 각자의 상황에 따라 적당한 처방처럼 순환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뫼비우스의 띠의 앞면에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뒷면에 서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루는 양으로, 또 다른 하루는 음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의연하게 맞닥드리면 된다. 한 생명의 숨이 다 할 때까지 그것은 반복하고 또 순환한다. 


지천명에 골드문트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회고한 헤세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여러 작품에서 설명한 바 있다. 자아 찾기라는 동일한 주제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 그의 소설을 잠시 잊고 있다가도 또다시 손이 가는 이유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말과 글로 간단히 설명이 가능하다면 책을 필요도 없겠지만. 십오 분가량으로 최적화된 인스턴트 콘텐츠들이 즐비한 대 유튜브 시대에서 500페이지가량되는 책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점점 줄어가는 독서 인구를 보며, 책을 주제로 이야기할 사람에 굶주려 있는 내 모습이 가끔은 처량해 보인다. 지붕 위에서 외계인을 기다리며 교신을 시도하는 아이처럼, 기다리는, 보는 사람도 없는 글을 꾸준히 업로드한다. 관심 없는 사람에겐 한 끼를 먹기 위해 직접 벼를 키워 재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작가가 남긴 문장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대화를 곱씹으며 느끼는 고양감은 여느 매체에서도 느낄 수 없다. 이것이 기존 산업을 해체시키는 거센 물결 속에서도 독서라는 행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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