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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Apr 16. 2021

술은 죄가 없다

<안녕 주정뱅이> - 권여선

세상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술을 마시는 사람, 마시지 않는 사람. 나는 후자에 속한다. 그 이유인 즉, 마시면 괴로워 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괴로움이란 물리적인 고통을 말한다. 현실의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술이 나에게는 폭력을 선사하니 나로서는 마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족이겠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우선 얼굴에 피가 급격히 쏠린다. 몸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피어오르고 혀가 굳는다. 보통 사람이 한계치까지 마셨을 때의 증상이 나에겐 생맥주 한 모금만으로도 충분하다. 추가로 한국의 술 문화는 내가 완전히 술로부터 도망치게 된 큰 이유다. ‘오늘 마시고 죽자’, ‘내가 취했으니 너도 취해야 한다’, ‘내가 주는 술을 안 마셔? 나를 무시하네?’, ‘감히 술자리에서 먼저 가려고 해?’, ‘술도 안 먹으면서 왜 안주만 처먹냐’, 등 술과 함께한 나날들 중에 기분 좋은 경험은 손에 꼽는다. 사실 술은 죄가 없다. 술을 마신 사람이 잘못이다. 지독한 우연으로 내 주변엔 이상한 술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거다. 술이라는 것이 어쩌면 꽤 좋은 것일지도?라고 생각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호감이 있는 이성과의 술자리에서 내 의지로 마셨던 술은 멀리 도망친 내가 다시 술에게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술김에 던진 말실수, 헛된 다짐과 약속, 설익은 사랑고백 등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끔찍하지만 그 순간만은 나도 진정 술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나도 상대에게 이상한 술 문화를 체감하게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술 없는 세상은 끔찍할 거다. 기분 좋게 취하는 낙으로 사는 이들에게 있어 삶의 가장 큰 기쁨을 빼앗는 격이니까. 하지만 매일의 뉴스 속 애꿎은 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자들에 의해 술은 오늘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적립하고 있다. 유사 이래 술은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나게 했지만, 취할 수 있는 기쁨은 종교와 더불어 거대한 문명을 꽃피우게 했다. 술의 힘을 빌려 어두운 방구석에서 기침을 하며 외롭게 글을 쓸 것 같은 작가들의 이미지에도 빠질 수 없다. 나는 술을 싫어하면서 술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홍상수 영화들 속 취한 사람들. 취하지 않고는 이 캄캄한 밤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녕 주정뱅이>는 짧지만 무겁다. 후르츠 칵테일이나, 맥주처럼 가볍지 않고, 소주처럼 싸고 빠르지 않다. 위스키처럼 비싸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마치 오래전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따자며 기억도 안나는 옛 시절에 담가놓은 묵은 과일주 같다. 그 과일주를 마시게 되는 날은 약속했던 날이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삶 가운데서 맞닥드린 서늘한 비극을 마주한 뒤일 확률이 높다. 맨 정신으론 절대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에 벌컥 들이키게 되는.


현실에서 단호하게 끊겨버린 관계가 술로써 흐려지거나, 다시 묶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향수에 취해있다. 특정한 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술을 마심으로써 각자가 기억하는 과거로 돌아간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괴롭다. 괴로우니까 술을 마신다. 이윽고 술에 의지하게 됨으로써 현실은 더 악화된다. 작은 꼬마 나사가 피부를 서서히 꿰뚫어가듯 사소한 사건과 오해로 점철된 비극은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넘어 독자 스스로에게 공포감을 자아낸다. 술을 마시고 그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가장 진실된 순간이라 말하는 그 찰나는 긴 터널 같은 인생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강렬한 해갈이다. 시간 제한등 같은 순간의 행복에 기댄 인간은 나약하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은 취해있지 않은 인간의 그것을 조금 더 확장시킨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불안한 눈으로 서성이는 모습은 고된 현실에서 어떻게든 잠깐의 빛을 더듬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어울리고 다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위로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는, 소설이라는 매체가 가진 강한 힘을 발휘하는 권여선 작가의 능력에 다시금 놀란다.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짧은 글로 형언할 수 없는 문화 속에서 피어난 인물 사이 대사를 가장 잘 이용하는 작가가 아닐까. 그녀가 건네는 손길은 따뜻하지 않다. 소주가 가득 담긴 작은 잔처럼 차갑다. 책을 덮고 난 후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듯 속이 뜨겁게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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