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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Mar 10. 2021

김치볶음밥을 먹으면서

혼자 저녁으로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작은 가게지만 맛이 좋고 가격이 저렴해서인지 이 시간엔 항상 사람이 붐빈다. 팬에 시선을 고정하고 베이컨 기름에 적절하게 절여진 김치볶음밥을 음미한다. 작은 가게인 탓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싫든 좋든 옆 테이블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입으로는 밥을, 귀로는 옆 테이블의 대화를 차곡차곡 넣는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 서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보아 직장 동료로 보인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넷플릭스다. 요즘 볼만한 게 뭐가 있는지에 대해. 머리를 묶은 여자는 <나의 아저씨>에 대해 열렬히 말한다. 얼마나 좋은 드라마인가에 대해.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 공동선의 순환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라는 말로 일행을 설득한다. 헌데 남자는 도통 모르겠다는 뉘앙스로 반응한다. 드라마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주연 배우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손이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게 마주 앉은 둘의 거리감은 마치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듯하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이 얼큰하게 취한 채 신입사원에게 자신의 이십여 년 전 영업 무용담을 늘어트리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흘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허공 난무. 입에서 소리가 날뿐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고 앞에서 힘없이 추락한다. 남자의 턴이 돌아왔다. 남자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 같다. <원펀맨>, <진격의 거인> 그리고 <귀멸의 칼날>까지, 테이블의 바통을 넘겨받은 남자는 신나게 이야기한다. 아까와 같은 뚱한 반응과는 딴판이다. 이 애니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지에 대해 마스크도 턱으로 내린 채 열심히 침을 튀긴다. 머리를 푼 여자는 도통 말이 없다. 그들 사이의 대화에 지쳐버렸다는 듯이 주문 번호가 적인 종이 쪼가리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말을 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만 온 신경은 주문 번호가 적힌 종이를 움켜쥔 손가락에 가득하다. 그녀는 주인장이 테이블에 할당된 주문 번호를 부르기만을 애타게 바라는 듯 보인다.


제대로 소통한다는 것. 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뜻의 이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아주 작은 스몰 토크에서 조차 나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하물며 매일 같이 정해지 시간을 마주하는 직장 종료와는 어떨까. 나 역시 이상적인 소통과는 매우 동떨어진 처지임에 틀림없다. 나는 회사에서 업무 외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할걸 아니까. 여전사 아마존처럼 무수한 화살을 날려도 보이지 않는 어떤 벽에 의해 힘없이 툭 떨어진다. 단 한 발의 화살도 적중하지 못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화살을 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동료들과 나누는 소통이 허공에 흩날리는 담배연기처럼 무용하게 느껴진다. 주식과 부동산, 업무 이야기, 옆 팀 부서 가십이나 뒷담화가 아니면 어제 소화한 시간을 억지로 게워내 이야기해야 하는 스스로가 처연해진다. 이제는 김치볶음밥과의 일방향 소통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혼밥이 익숙해질수록 타인과의 거리감은 비대해진다. 수도권에서 저 멀리 떨어진 광역시로, 혹은 저 멀리 다른 차원의 우주까지. 평생 동안 발버둥 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

예전엔 억지로 버티고 앉아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긴 터널의 끝을 빠져나오면 전과 다른 풍경이 펼쳐지길 기대하며 꿋꿋이 버텼다. 술 한잔도 겨우 마시면서 술자리에 끝까지 남으려 억지 노력을 부렸다. 그러면 그들과 소통이 가능할 거라 믿었던 걸까. 언제부턴가 포기가 빨라졌다. 사람에 대한,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줄었다. 소통에 대한 욕구는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인터넷에 배출한다.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다. 술을 싫어하고 다독가에 예술 영화를 즐겨보는,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 존재한다. 평생 살면서 한 번 보기 힘든 전설의 포켓몬 같은 사람들. 막상 현실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뻔하디 뻔한 질문을 던지겠지.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나는 김치볶음밥 보다 못한 존재가 되버린다.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을때, 멜랑콜리한 체관으로 가득찬 오만한 판단으로 허투루 날려버린 수 많은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쩌면 약 삼십 년가량의 삶 가운데 나도 모른 사이 지나간 키팅 선생님을, 혹은 카페에서 뻐꾸기를 날리는 시시한 남자들에 지친 보부아르를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보이지 않는 벽에 스스로를 가둔 채 김치볶음밥이나 퍼먹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언젠가 이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리란 작은 희망을 품는 것에 만족한다. 인터넷 세상에 존재하는 그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에게 중요치 않다.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게 목적이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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