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을 먹으면서
기사 식당을 자주 간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메뉴를 골라 백반을 먹을 수 있으니 혼밥 하기 최적의 장소다. 이런 탓에 기사 식당은 다양한 사람이 드나든다. 앳된 학생부터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까지. 저렴한 가격으로 배를 두둑하게 채울 수 있는 이곳에는 서민들의 세월이 그을려있다. 혼밥의 성지이자 모진 삶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기사 식당의 주요 고객은 남자들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자, 부모의 기대를 잔뜩 업은 아들의 무게는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의 표정에서 어렴풋이 느껴진다. 주문한 지 십분 이내에 빠르게 차려지는 한상, 약속이나 한 듯 허겁지겁 먹는 모습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게 한다.
대각선에 앉은 중년 남자 둘은 걸걸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직장 동료로 보이는 두 남자는 자주 드나드는 식당인 듯 서빙하는 아주머니에게 너스레를 떤다. 나이를 얼마 먹지 않았는데 앉을 때마다 아이고 소리가 난다는 둥, 날씨가 춥다는 둥, 오늘 반찬이 뭐냐는 둥. 저녁 시간에 몰려오는 손님들 통에 아주머니는 대꾸할 힘이 없어 보인다. 대답 대신 힘 빠진 헛웃음으로 흘려보낸다. 마스크도 그녀의 피곤을 가리지 못한다. 깊게 파인 눈가의 주름 사이엔 고된 하루가 새겨져 있다. 노동은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깊은 산속 오래된 절 한가운데 있는 몇백 년 묵은 나무처럼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중년 사내들의 추파는 나무의 가지조차 흔들지 못한다. 둘은 열심히 떠든다. 직장의 누가 개새끼라는 둥,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쳤다는 둥, 이 장소에 없는 이에게 분노를 쏟고 있다. 저녁으로는 분노를 식힐 수 없어 이내 소주를 주문한다. 혼밥 하는 이들 사이에 오직 그 둘에게만 보이는 불이 존재한다. 그들의 대화를 차단하니 티비의 소리가 들린다. 얼마 남지 않은 대선 정국에서 후보 사이의 네거티브 공방이 한참이다. 차기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 도덕성이 가장 중차대한 일인 듯이 언론은 연일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낸다. 정책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순간부터 정치라는 의미가 바뀐 듯하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인지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상대는 완전한 오답이며 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적은 늘 외부에 있었다. 오랑캐부터 일제 그리고 공산당으로, 독재정권까지 일련의 절대 악을 상정해 그것들에 대항하고자 민족주의적 단결을 이끌었다. 촛불 혁명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자들이 권력을 쥐었다. 국민 대부분이 무언가 달라질 거라 기대했다. 적을 다 몰아냈으니 드디어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왜 우리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거지? 왜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거지? 애꿎은 원인을 이념에 담아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남녀 갈등, 세대갈등, 빈부격차의 갈등까지,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에서 적을 찾기 시작했다. 공교롭게 전염병까지 뒤덮인 세상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원망만 확인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백마 탄 초인을 기대한다. 절대적 지도자가 자신들의 처참한 삶을 구원해주기를 바란다. 머리가 아파온다. 소리를 닫고 고개를 돌려 제육을 씹는데 집중한다.
왼쪽의 남자는 앳된 얼굴이다. 이마를 완전히 덮은 덥수룩한 머리, 검은 뿔테 안경,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모서리가 깨진 아이폰을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다. 구겨진 표정과는 반대로 엄지는 쉬지 않고 까닥거리고 있다. 취업이 안돼 답답한 마음인지 앉자마자 오른 다리를 시종일관 떨어댄다. 취업이 안되면 안돼서 답답하고 되면 돼서 답답하다. 절벽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같은 나이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해서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면 반은 성공한 인생이었다. 성실과 노력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졌고 부모들은 제 자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다. 내 또래 세대들은 그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인내해왔다. 수능과 대학, 취업의 좁은 깔때기를 통과하면서 마음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옆의 사람이 떨어져야 했다. 부모들이 바라는 인간이 되려면 그래야 했다. 겨우 직장을 잡아보니 집 값은 천외천으로 치솟았다.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성실과 노력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원래 부자였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다시 부자가 되고 있었다. 삼십 년가량 믿고 있던 세상이 뒤집혔다. 직장에서의 성공은 의미 없어지고 있다. 아침 9시만 되면 화장실 칸이 가득 찬다. 주식과 코인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며 하루에도 몇십 번 관련 앱을 켰다 끈다. 누가 몇십억을 벌어 회사를 떄려쳤다더라. 회사에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왔다더라. 하는 건너 듣는 이야기는 처음엔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내 한 없이 초라해진 자신의 계좌 잔고를 보게 한다. 늙어가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와 눈에 피가 쏠린다. 인터넷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분노를 표출하는 글을 올린다. 공감과 댓글을 주고받는다. 얼핏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글을 친구들에게 공유한다. 스스로 적당히 배웠다고 생각한 이들이 취사선택한 왜곡된 정보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과학적 통계와 검증된 전문가들의 의견보다 내 주변 사람들의 경험과 취사선택된 언론의 기사를 믿기 시작했다. 과학보다 감정이 우세하게 되고 정부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 방향은 불난 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혼란을 가세시켰다. 영화 <돈 룩업>은 반지성주의로 물든 미국 사회를 묘사한 블랙 코미디이다. 다소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의견은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이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압도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진 이들은 상대를 조롱하고 무시한다. 왜 그렇게 심각한 거야? 웃고 즐기기에도 인생은 짧아! 씁쓸한 웃음 뒤 서늘한 감정이 밀려온다. 내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을 모르고 있다 한참을 지나 거울 속에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한민국은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인물의 이슈에 묻힌 정책 어젠다는 사라진 지 오래다. 편을 갈라 나뉜 이들은 상대를 조롱하기 바쁘다. 엄지는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