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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Sep 05. 2022

비행기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질문 있어요! #29]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승객 중에 의사 있습니까?"


비행 중에 이런 방송 들어본 사람이 있을 거다. 기내 환자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기내 환경이 저기압에다 공간이 답답하고 건조하며, 심리적으로도 불안하다 보니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지병을 가진 사람의 심각한 발병부터 착륙할  즈음 완쾌되는 나이롱환자까지 유형도 다양하다. 이번에는  심각한 환자를 태웠던 기억을 소환해서 답변해 보겠다. 이야기에 아주 약간의 양념이 쳐졌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럼, 슬기로운 의사의 비행 생활, .




인천을 출발하여 파리까지 가는 거함 에어버스 A380. 400명에 가까운 승객을 빵빵하게 싣고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었다. 모스크바 상공을 지날 즈음, 사무장이 인터폰을 걸어 기내 환자 발생을 보고했다.


"기장님, 환자 한 분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요. 다행히 닥터 페이징(Doctor Phasing) 해서 의사가 두 분이나 나오셨어요. 두 분 신분증을 확인했는데, 특히 한 분은 XX 대학병원 신경외과 전문의라서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아요. 지금 환자가 의식이 없으신데, 우선 EMK(Emergency Medical Kit) 사용을 허락해 주세요."


"네네, 사용을 허락합니다. 신경외과 전문의라니 정말 다행이네요. 일단 응급처치하시고, 승객 정보와 바이탈 체크해서 조종실로 갖고 오세요!"


기내에는 세 가지 의료용 장비 키트가 있는데, FAK(First Aid Kit), EMK(Emergency Medical Kit), 그리고 UPK(Universal Precaution Kit)가 그것이다. 그밖에 AED라고 부르는 심폐소생술용 자동제세동기가 실려있고, 휴대용 산소 호흡기를 응급 의료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FAK는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EMK에는 인공기도, 카테터, 주사기 같은 의료 장비와 에피네플린,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응급 약품이 들어있어 기장의 승인하에 오직 의료인만 사용할 수 있다. AED는 심폐소생술 훈련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는 승무원이나 구급요원도 사용할 수 있다. UPK는 감염 예방을 위한 바이오해저드(Biohazard) 관련 장비들이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AED


여기서 의료인이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또는 조산사가 해당된다. 119 구급요원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있으나 관련 자격증이 없으면 의료인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같은 의료인이라 할지라도 사망 선고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의사, 치과의사 그리고 한의사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타고 있지 않으면, 비행기에서 사람이 죽어도 도착해서 의료기관에 인도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다. 원칙상 승무원은 비행 중 심폐소생술과 같은 응급조치를 계속해야 하지만, 항공사에 따라 '사망 추정' 개념을 도입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 응급조치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사망자와 비슷하게 처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망자와 사망 추정자 처리 절차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계속 비행을 할 수 있냐, 못하냐이다. 의료인이 사망 판정을 내리면, 상황에 따라 비상상황을 종료하고 목적지까지 계속 비행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사망자를 좌석에 고정하고 담요를 덮은 후, 주변의 승객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사망자를 격리시킨 상태에서 비행을 계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망 추정의 경우는 아직 메디컬 이머전시 상태로 보아야 하며, 의료 지원이 가능한 가까운 공항에 착륙하여야 한다.


의사를 부르면 항상 짠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의사나 의료인이 아무도 없다면 환자에게도 불운이다. 이경우에는 회사와 계약된 의료서비스 기관과 위성 통화로 정보를 교환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메이저 항공사들은 직접 항공보건 의료실을 운영하여 회사 소속의 의사들이 위성 전화로 승무원과 통화를 하며 상황을 통제하고 지휘하기도 한다. 그래도 기내에서 의사가 직접 진료할 수도, 전문적인 의료 처치도 할 수도 없으니 한계는 분명히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환자는 60대 남성이었고, 신경외과 의사는 응급 수술을 위해 회항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장은 사무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본사 통제실과 연락하여 모스크바로 회항할 것을 결정했다. 회항 준비를 한 참 하고 있을 때, 통제실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모스크바 지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모스크바가 지난밤 폭설로 시내 교통이 마비된 상태라고 합니다. 프라하로 회항하면 어떨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세요. 기내 상황은 어떤가요?"


"프라하 까지 가면 한 시간은 더 걸릴 텐데요. 지금 모스크바 기상은 좋은데, 뭐가 문제라고요?"


"모스크바 공항에 수술을 할 수 있는 의료시설이 없고, 수술하려면 시내 병원까지 앰뷸런스로 이송을 해야 하는데, 어제 폭설로 시내 교통이 극심한 정체를 보이고 있어 이송하는데 세 시간은 걸릴 거라고 합니다. 차라리 프라하로 가는 편이 더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난감했다. 앰뷸런스도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차가 막힌다는 것인가?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세상 모든 곳이 서울만 같지 않아서 이런 황당한 상황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무장을 통해 의사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환자가 약간 의식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의사는 고민 끝에 한 시간이라도 빨리 수술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불확실한 상황을 배제하고 차라리 조금 더 비행하는 것이 나을 수 있겠다고 조언했다. 프라하로 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회항지를 변경하여 프라하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꼬여버린 상황은 순진하게 풀리지 않았다. 폴란드를 지날 즈음, 다시 통제실에서 당황스러운 연락이 왔다.


"기장님, 환자 상태는 어떤가요? 문제가 있는데... 프라하로 회항하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왜죠?"


"지금 프라하 공항에 A380을 푸시 백 할 수 있는 토우바(Tow-bar)가 없어요. 지금 주변에서 수배하고 있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육상으로 수송해오거나, 서울에서 저희 프라하행 비행기에 싣고 가야 해요. 만약 프라하에 착륙하면 오늘 다시 이륙할 수 없어요.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것 같습니다. 환자 상태는 그대로 인가요? 프랑크푸르트까지 견딜 수 없을까요? 한 30분만 더 비행하면 될 텐데요. 프라하에 착륙하면 나머지 승객들 핸들링이 난감해져요. "

나는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의사와 상의해서 결정해야 했다. 환자 상태도 볼 겸 직접 의사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의사부터 자신이 프라하에 갇히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당장 다음날 파리에서 세미나 발표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자신의 스케줄을 고려해서 환자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연이은 배드 뉴스 와중에 굿 뉴스가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의식이 많이 돌아와 어눌하지만 의사소통도 조금 가능할 정도였다. 이대로 계속 비행해도 될까?


"일단 출혈이 악화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 같고, 이 상태로 일단 안정을 찾고 있어요. 의식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은 아주 좋은 사인입니다. 뇌혈관이 산소를 계속 공급하고 있는 거죠. 제 생각에 이 정도면 몇 시간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까지 안정세가 계속될지 모르니 수술은 가능한 한 빨리 받아야 합니다."


"프랑크프루트에서 20분만 더 가면 파리인데, 파리까지 가면 어떤가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아요. 파리로 가시죠."


"그럼 목적지인 파리에 착륙하겠습니다."


환자는 혼자 여행하고 있었고 동승한 보호자가 없었다. 본사 통제실은 보호자에게 비상 연락을 취하고 항공보건 의료실을 통해 그의 의료기록을 확보하기로 했다.




파리에 착륙 후 승객들에게 자리에 앉아 기다려 달라고 방송을 했다. 구급대원들이 탑승하여 환자를 먼저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프랑스인 구급대원의 태도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3시간 전에 이미 발병한 사실을 듣고는, '뇌졸중은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거나 불구가 될 수 있으니 도중에 회항을 했어야 한다'라고 나무랐다. 감정이 격해진 대원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할 여유도, 이유도 없어서 그냥 빨리 병원으로 호송해달라고 부탁하며 환자를 인도했다. 함께 있던 신경외과의사는 전문적인 처치와 소견으로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분위기에 승객들 앞에서 뻘쭘해했다.



내 경험에 특히 A380을 탈 때 기내 환자가 많았었다. 일단 승객이 아주 많이 탔고, 승객들은 신체 건강한 관광객들보다는 주로 가족 방문이나 사업 등 개인 일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민자들의 가족 방문의 경우, 연로한 승객들이 많아 비행 도중 지병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사례가 자주 있었다. 심지어 의료용 산소 호흡기를 갖고 타는 '원래 환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의료인과 보호자가 함께 여행하므로 오히려 걱정이 덜된다.


구급 대원이 사정을 모르고 우리를 나무랐지만 사실 A380은 이륙중량이 500톤이나 되는 크고 무거운 비행기라 회항할 수 있는 공항도 한정적이다. 너무나 다급한 비상상황이라 아무 공항에나 착륙하면 제때 다시 이륙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파리 지점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나에게 큰소리로 나무라던 구급대원이 생각나서 양심에 가책도 조금 느꼈다. '아무리 다시 이륙을 못한다고 해도 프라하에 내렸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상황은 럭비공처럼 엉뚱하게 바운스 했다. 공항 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자가 비행기에서 내린 후 보호자가 없어서 입국 수속에 애를 먹었고, 앰뷸런스에 환자를 방치하다가 늦게 출발해서 공항에서 병원까지 가는데만 3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하여 급하게 유선으로 가족을 연결했으나, 가족이 직접 와서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고 하여 도착한 지 열두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만큼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어서 이런 절차와 원칙을 따지는 것이겠지만, 어제의 긴박했던 상황을 생각하니 허무했다. 아니,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화가 났다. 이 사람들 너무한 거 아니야?  


다행히 스페인에 있는 환자의 조카가 뒤늦게 사인을 하러 왔고, 환자는 결국 쓰러진 지 이틀 만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이 잘 되어 목숨이 위태롭거나 불구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천만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환자의 상태가 최악이 아니어서 지연되기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최선의 처치를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미안했다. 프라하를 포기하고 파리까지 가자고 했을 때 환자의 부인이나 아들 딸이 옆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대부분의 승객을 위해 가장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믿지만,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고뇌와 번뇌는 여기서 그만 끝내고 글을 마무리하겠다. 건강이 의심스럽다면 절대로 혼자 여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 정의하기 어려우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글로벌 사회라지만, 아직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개념과 절차가 많다. 세계를 다니려면 호기심을 넘어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상식과 관념이 나를 지켜주지 않더라. 인생의 절반을 쏘다녔는데 오히려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나는 비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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