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실에서 보는 세상 1-5
Hunt
꿈과 희망을 사냥하지 마라
2011년 글을 2022년에 다시 쓰다.
2001년 9월 12일. 이날 저녁 뉴스를 보았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속에나 나올만한 광경이 ‘CNN Live’, ‘FOX News’ 자막과 함께 TV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었다. R.I.P.
그것은 바로 충격의 9/11 테러사건이었다. 네 대의 민간 여객기가 납치되었고, 이들의 가미가제식 자살 테러로 맨해튼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이 공격받았다. 미국 동부시간으로 9월 11일 오전이었고 한국시간으로는 9월 12일 저녁이었다. 이 낯선 광경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나는 여태껏 내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서운 무기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 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면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정말 좋은 것도 가르쳐 주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수세에 놓인 일본군은 비행장 주변을 서성이는 남자아이들을 꼬여내었다. 이 아이들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비행기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순수한 남자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러운 레이센(零船: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주력 전투기. 흔히 ‘Zero’ 전투기라고 불림.) 조종사가 되어 태평양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가슴 벅찬 꿈을 꾸고 있었다.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비행장 안으로 불러들였을 때, 아이들은 마침내 꿈이 이루어져 이제 곧 위기의 일본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위대한 영웅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영웅’의 모습을 가르쳤다. 아이들도 결국 자신의 운명이 ‘인스턴트 파일럿’이 되어 ‘단 한 번의 출격’에 나서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가족과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운명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슬픔은 막을 길이 없었고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슬픔을 잊으려 가슴에 총알을 5발이나 맞고도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는 어느 선배 조종사의 영웅담을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가슴에 수없이 총알을 맞은 것처럼 느껴졌다.
비행기를 태워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게 여겼던 순진한 시골 아이들은 단 일주일 만에 달랑 15시간의 매우 특별한 비행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작은 가슴속에 일장기를 한 장씩 품은 채 일 왕이 하사하는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사지로 보내어졌다. 떠나는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착륙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에는 탱크 가득 연료가 실렸지만, 그 연료는 배불리 먹고 날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바로 미 해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유명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였다.
9/11은 현대판 가미가제였다. 비행기를 탈취한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고, 자살임무 수행을 위해 경비행기를 겨우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비행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비행’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들은 ‘비행’이 가진 아름다운 의미를 알지 못했다. 테러리스트들은 비행기를 ‘사냥’ 했다. 사냥당한 비행기들은 자유롭게 날지 못했고, 더 큰 사냥을 위한 먹잇감이 되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날개 달린 기계’가 그만 아이들과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 것이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말이다!
테러리스트들도 분명 죽기 직전까지 조종실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졌을 맨해튼의 풍경은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과연 그것은 악의 제국을 상징하는 증오의 공격 대상으로 보였을까? 혹시 게임 속 가상현실 도시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정말 궁금했다. 나도 맨해튼의 하늘을 날아 보았지만, 맑은 아침 하늘에서 바라본 마천루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충돌 직전까지도 비행기의 조종실은 온통 따스한 가을 햇살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빌딩의 창문들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을 것이고, 그 찬란한 햇살 속에서 쌍둥이 빌딩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행기의 아름다운 날개를 거울처럼 선명히 비춰주고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모습들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서론이 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에 글이 정리가 잘 안 되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비행기 피랍(Hijacking)’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어볼까 한다. 이 이야기는 9/11 테러가 일어났던 날 서울을 출발하여 뉴욕을 향해 비행하던 한 동료 조종사가 겪은 경험담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가능한 실감 나게 글을 써 내려가 보겠다.
한국시간으로 2001년 9월 12일 저녁, 9/11 테러가 발생하기 서너 시간 전에 나의 입사 동기였던 모 부기장은 뉴욕을 향한 B747-400 점보 비행기 KEXXX 편에 탑승했다. 서울을 출발하여 한 참 태평양을 건너던 중, 회사로부터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충 읽어보니 비행기 납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아마도 뉴욕에서 비행기 납치 소동이 벌어진 것 같았다. 메시지에 적힌 문구가 워낙 간단했고, 회사로부터 특별히 어떻게 하라는 지시가 없었으므로 비행은 평소와 같이 계속 진행되었다. 당시 조종석에는 교육을 받고 있던 수습 부기장이 함께 비행을 하고 있었는데, 교관이었던 기장은 문득 공부할 과제가 생각이 난 듯, 수습 부기장에게 비행기 피랍(Hijack) 시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조치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비행기 피랍 시 비상절차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데이터 통신을 이용한 피랍사실 보고 요령이다. 데이터 통신 전송 장치의 단말기 화면을 보면 여러 가지 선택 메뉴 중에 테러리스트들이 알 수 없도록 암호화된 선택 메뉴가 하나 있는데, 교관은 수습 부기장에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몇 번에 걸쳐 메뉴를 선택하여 비행기가 피랍되었음을 알리는 최종 실행 단계에 이르자, 과목 수업을 마치며 교관 기장이 말했다.
“자, 이제 이거만 누르면 여기저기서 온통 난리가 나는 거야. 알겠지? 이제 취소하고 홈 메뉴로 돌아가자.”
교관 기장은 취소키를 눌렀고, 단말기는 다시 홈 메뉴 페이지로 돌아왔다. 이제 순조로운 비행이 계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하필이면 9/11이 발생한 직후였고, 이들의 순수한 비행연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기가 막힌 해프닝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는 이미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테러 공격을 받은 상태였고, 백악관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최고 수준의 비상 대응을 명령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비행 공역은 즉시 모두 봉쇄되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항공기는 모두 기수를 돌려 회항해야 했고, 이미 미국 공역 내에 있는 비행기들은 즉시 가장 가까운 공항에 비상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의 항공관제 센터들은 분주하게 미국 하늘을 비우고 있었으며, FBI, CIA, NSA 등 모든 경찰과 첩보기관들은 가용한 모든 채널을 통해 추가 비행기 피랍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란에 가까운 첩보 활동은 뉴욕을 향해 비행하고 있던 대한항공 XXX 편 점보 여객기를 예의 주시하게 하였다. 놀랍게도, 교관과 학생이 함께 조작하였던 그 데이터 통신 단말기는 테러 발생 직후부터 미정보국이 내내 감시하고 있었다. 비행 중 각종 메시지를 주고받고 필요한 자료를 다운/업로드할 수 있는 이 장치는 항공 통신 서비스사에 돈을 지불하고 유료로 사용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통신망을 모두 장악한 미정보국은 단말기의 모든 사용기록을 추적하며 승무원들이 선택했던 메뉴와 입력한 키 하나하나를 모두 사찰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법일 것 같은데, 미국이 공격받는 마당에 그것을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승무원들이 단말기에 메뉴를 확인했을 뿐 실제로 피랍 메시지를 전송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 정보국은 조종사들이 무슨 키를 눌렀는지 샅샅이 알고 있었으며, 이들 비행기의 피랍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행기가 일본 관제공역인 캄차카반도 남쪽을 지나서 미국 관제공역인 ‘앵커리지 비행정보구역’에 들어서자, 앵커리지센터의 항로관제사는 대한항공 XXX 편을 불러 비장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였다.
“대한항공 XXX 편, 너희는 현재 1234 상황인가?”
뜻밖의 질문에 승무원들은 어리둥절해진다. (‘1234’는 피랍 시 레이더 전송기에 입력하도록 약속된 4자리 비상 암호코드를 의미하는데, 물론 실제 암호 코드는 이것과 다른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보안상 이 글에서는 실제 코드 대신 1234라는 숫자를 사용하겠다. 양해해 달라.)
“앵커리지 센터, 다시 말해 달라.”
“다시 말하겠다. 대한항공 XXX 편, 너희는 현재 코드 1234 상황인가?”
“아니다! 우리는 정상상황이다. 음……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대한항공 XXX 편, 너희를 캐나다 화이트홀스 공항에 착륙시키겠다. 잠시 현 항로를 유지하라.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화이트홀스는 또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깜짝 놀란 수습 부기장이 무선 교신을 통해 다시 한번 피랍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앵커리지센터, 무슨 소리냐? 우리 목적지는 뉴욕 JFK이다. 우리는 정상 상황이다. 피랍되지 않았다.”
“현재 미국 공역은 모두 폐쇄되었다. 어떤 민간 비행기도 미국 영공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공중에 떠있는 모든 항공기는 즉시 비상착륙 하여야 한다.”
얼마 전 회사에서 메시지로 알려준 그 사건 때문에 전 미국 영공이 폐쇄되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미국의 도시를 목적지로 하는 모든 비행기들이 회항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대한항공 XXX, 항로를 090방향으로 틀어라. 그리고 레이더 트랜스폰더에 ‘1234’를 입력하라.”
“앵커리지 센터, 알았다. 헤딩 090으로 선회한다. 그런데 다시 말한다. 우리는 피랍되지 않았다. 1234 상황이 아니다.”
“대한항공 XXX 편, 시키는 대로 해라. 레이더 트랜스폰더를 1234로 셋 하라.”
“앵커리지,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1234 상황이 아니다!”
“대한항공 XXX 편,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미 공군의 요격 절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창밖으로 가끔씩 미 공군 전투기가 지나간다. 이게 F-15인가? 관제사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못해 이제는 위협적이었다. 평소 가끔씩 “안… 뇽… 하… 세요”라며 어설픈 한국말로 친밀감을 드러내던 앵커리지센터 관제사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뭔가 매우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승무원들은 이들이 내리는 지시를 무조건 따르기로 결정했다. 결국 레이더 트랜스폰더에도 ‘1234’를 입력하였고, 앵커리지센터의 지시에 따라 인적이 드문 캐나다 북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화이트홀스(White Horse)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대한항공 XXX 편뿐만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던 비행기들은 모두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캐나다의 작은 공항들로 회항하였다. 미국은 이미 ‘전쟁’ 상태였으며, 미국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비행기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민항기 조종사에게는 어떤 요구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조건 미국 관제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으며, 주위를 배회하는 F-15 이글 전투기들은 언제든 요격을 위해 접근해 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XXX 편은 결국 앵커리지를 향하던 또 한대의 점보 747 화물기와 함께 화이트홀스에 비상착륙 하게 되었다.
그런데 XXX 편은 다른 비행기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앞서 말했던 데이터 통신 기록을 이유로 대한항공 XXX 편을 피랍 가능성이 높은 비행기로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관제사가 레이더 트랜스폰더 코드 ‘1234’를 입력하도록 지시했던 것이고, 화이트홀스에 비상착륙을 한 후에도 경찰들이 이 비행기에 대해 더 철저한 조사를 했던 것이었다. 사실, 데이터 통신 기록 추적 외에도, 이 비행기의 목적지가‘뉴욕’이라는 점, 외국 국적 여객기이므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본토로 입국할 필요 없이(외국에서 탑승하여) 직접 미국 주요 도시로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에 미정보국은 다른 비행기보다 대한항공 XXX 편을 더 높은 수준의 테러위험 비행기로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미국의 조사보고서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더욱 기막힌 사실은 당시 앵커리지센터 관제사가 ‘대한항공 XXX편의 승무원들이 무선 교신 중에 피랍되었음을 의미하는 비상 암 구호를 조심스럽게 사용했다’고 보고한 점이다. 역시 보안상 그 단어가 무엇인지 이 글에서 말할 수 없다. 단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 단어는 짧고 강한 악센트를 가진 영어 단어인데, 물론 우리 승무원들이 그 단어를 사용할 이유도, 사용한 적도 없었다. 매우 민감한 상황에서 예민할 수밖에 없는 미국 관제사가 착각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XXX 편이 화이트홀스공항에 착륙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테러가 발생한 미국 동부는 이미 오후가 되었다. 맑은 날씨의 화이트홀스 공항은 아담하다 못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작은 여객 터미널 건물 옥상에는 검고 둥근 헬멧을 쓴 경찰 특공대들이 마치 개미들처럼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공항 안에는 등에‘FBI’라고 쓰여있는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호기심에 찬 시민들이 모여있었다. 간혹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금발미녀가 마이크를 들고 열심히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아마 방송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광경이 조종실에서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손바닥처럼 작은 시골 공항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점보제트기의 모습은 마치 새로 출시된 레고 장난감 세트나, 소인국에 막 붙잡혀온 걸리버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마을 사람들은 세기의 구경거리를 즐기기 위해 맥주 한 병과 카메라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점보 747 비행기가 이 공항에 착륙한 것은 공항 개항 후 두 번째였으며, 점보 비행기가 여러 대가 착륙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조종사들은 관제사가 지시하는 위치에 비행기를 멈춘 후 엔진 시동을 껐다. 주기한 위치는 실제 주기장이 아닌 터미널로부터 약간 떨어진 위치였다. 아마도 안전을 위한 조치인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스텝 카가 비행기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무선 교신으로 승무원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 그리고 조종사는 왼쪽 첫 번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라.”
“교관님 제가 일단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
내 동기 부기장이 자처하여 먼저 나가기로 했다. 수습부기장과 교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하라고 말했다. 왼쪽 첫 번째 도어를 열어젖히자, 눈부신 햇빛이 비행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지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사무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넨다.
“조심하세요, 부기장님. 저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세요.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잖아요?”
햇살이 따가웠지만, 뺨에 와닿는 공기는 차가웠다. 청사 옥상 위에 있던 경찰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상한 유색인종 조종사를 저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총구가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부기장을 조준하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막상 비행기 문밖을 나서니, 주위를 둘러싼 싸늘한 분위기에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광기 어린 상황에서 잘못하면 총에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디고 섰다.
확성기를 통해 영어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청사 앞쪽에 설치된 저지선 뒤로 헬멧과 방탄조끼, 그리고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경찰 특공대 한 명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뭐라고 말 한 거지? 이거 뭔가 해야 하는데……’ 긴장감이 극에 달하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겠다. 허리띠를 풀고 상의를 들어 올려 보여라!”
아! 다행히 이 친구들이 다시 한번 말해줬다. 긴장되어 미칠 것 같았지만, 이제 그들이 하는 말이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뒤로 천~천히 돌아봐라! 천천히!”
역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돌아 보였다.
“됐다! 이제 손들고 앞으로 이곳까지 천천히 전진하라! 천천히!”
모두 시키는 대로 했으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들어 올렸던 손을 어깨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가진 경찰이 크게 소리를 지른다.
“거기 멈춰!!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부기장은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빠져 걸어오다 발을 접 지르며 비틀거렸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왼쪽 구두가 벗겨져 버렸다. 당황하여 주섬주섬 빠져나온 발을 다시 구두에 넣고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왼팔을 내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왼손을 왼발 발꿈치에 갖다 대고 말았다. 그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듯 엄청난 기세로 쏟아졌다.
“Freeze!!!... Freeze!!.. Freeze!!!”
“Freeze! Put your hands off!!!”
경찰들은 예상치 못한 그의 동작에 그가 발목에 숨겨놓은 권총을 꺼내려하는 것으로 오해했나 보다. 여기저기서 동시 다발적으로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들렸고 소총과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한꺼번에 ‘철커덕’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는 신발을 신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하늘높이 번쩍 들었다. 머리를 양팔아래 깊숙이 처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었구나……’ 머릿속에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총성은 없었고, 다시 확성기를 통해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지시에 따라야 한다! 안 그러면 발포할 수 있다. 다시 천~천히 손들고 일어나라”
그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경찰이 시키는 대로 다시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저지선에 다다르자 경찰들은 그의 몸을 수색했으며,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미국 FBI로 신병을 인도했다. XXX 편이 피랍되거나 테러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도로 민감한 상황에서 미국이 예민하게 대응한 것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좀 억울하기도 했지만, 아무 일 없이, 누구의 잘, 잘못 없이 단지 해프닝으로 끝난 만큼 미국을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미국의 상징이자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뉴욕 한복판이 공격받아 수천 명의 무고한 미국 시민이 목숨을 잃은 마당에, 사실 어느 누구도 감히 미국의 과잉 대응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승객들은 FBI와 1대 1로 인터뷰를 모두 마칠 때까지 오랜 시간을 비행기에서 기다려야 했다. 승객과 승무원들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 수 있었다. 이곳은 캐나다 땅이었지만 실제 수사는 모두 미국이 주관하였고, XXX 편에 이어 착륙한 대한항공 YYY 편 화물기를 포함한 또 다른 비행기들이 비슷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며칠간 더 호텔에 묵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국 영공이 다시 열려야 비행기와 함께 그곳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승객은 엉망이 되어버린 여행 일정에 분노한 나머지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중무장한 FBI에게 반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우리 회사 직원들과 승무원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삼일이 지나서야 겨우 미국 영공이 열렸고, XXX 편은 다시 뉴욕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회사 안전보안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9월 12일 저녁 사건이 발생하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회사는 사고 상황을 방불케 하는 긴장된 모습이었다. TV뉴스는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공격받는 모습과 주식시장에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번갈아가며 끝없이 반복하여 보여주었다.
출근하자마자 화이트홀스에 있던 이 글의 주인공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일어난 일들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고생이 많다며 그를 위로해 주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한 잔 사겠다고 약속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와 통화한 지 몇 시간 후 누군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전화번호였는데, 받아보니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 통화한 입사동기 부기장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을 뻔했다며 오열하였다. 나는 이제 모두 무사하다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지만, 그녀의 슬픈 울음소리에 무척 마음 아팠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이미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비통함, 겨우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안도감이 뒤섞여 있겠지만, 내가 실감할 수 있는 여러 상황 속에 벌어진 일이라 더욱 아픈 것 같았다.
비행기는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이 사냥해서는 안된다. 하늘을 나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꿈인데. 제발 꿈과 희망을 해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