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필사

[221029] 정말 그럴 때가

by. 이어령

by NumBori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 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던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 보다 좀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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