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신청을 위해 급하게 쓴 두어 개의 에세이밖에 없는데도 나름 11분의 구독자가 생겼다.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유난이네' 하실 수 있겠지만, 나는 단 한 분이라도 참 감사하다. 지나가다 버스킹 공연을 보게 되면, 관객이 하나도 없는 것과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데 11명이나 된다니! 이 분들을 위해서라도 내 생각을 좀 더 자주 올려 봐야겠다.
글은 독자와 작가의 대화다. 그래서 오늘은 모니터를 넘어 질문을 던져본다. 여러분들은 고민이 많을 때 무엇을 하시는지? 나는 생각과 감정이 잘 정리가 되지 않을 때 펼쳐 보는 책이 한 권 있다. 자기 계발서나 종교서적이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다.
꽤나 닳은 내 책. 영문판을 보는 이유는 한글판을 동생 줘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고2 때 한글판을 외듯이 읽고, 왼 내용을 머리에 두고 이 영문판을 읽으면서 영어공부를 했었다.
고민이 많을 때면, 이 책을 집어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본다. 그렇게 랜덤으로 펼쳐진 페이지를 읽고, 그 페이지가 주는 메시지에서 힌트를 찾아보려 한다. 나에게는 일종의 신탁인 셈이다.
신화적 서사구조, 보편적 도상
이 행위는 물론 정말 합리적이지 않다. 2021년의 2월의 내가 가진 고민의 답이 1988년에 브라질 작가가 쓴 소설 속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도움을 얻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책에서 쓰인 서사구조와 도상의 보편성 때문이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혹시 모르는 분, 읽었다가 까먹은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연금술사는 산티아고라는 한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다. 이 소년은 양을 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는 한 아이가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그 아래에 보물이 묻혀있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산티아고는 양을 다 팔고 보물을 찾아 떠난다. 그 모험에서 왕, 연금술사, 사기꾼, 운명의 여인, 도적떼 등을 만나고, 결말은... 스포 하지 않기로 한다. 결말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영웅의 여정은 이런 양식을 띄고 있다고
이 이야기는 출발-> 입문-> 회귀의 전형적인 신화적 서사의 양식을 띄고 있다. 일상적인 삶을 살던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인해 초자연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 속에서 시험, 협력자, 적 등을 만나는 모험을 겪고 보상을 얻는 서사다. 이러한 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는 조셉 캠벨이 본인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나는 내 삶이 자아실현을 위한 모험이자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자리에서 자아실현을 위해 비슷한 구조의 모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스토리의 구조를 띈 소설들, 신화들이 사랑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삶에서 겪고 있는 위대한 여정을 이 이야기가 투영하고 있기 때문에.
정리하자면, 나는 내 삶이 자아실현을 위한 위대한 모험이라고 믿고 있고,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 연금술사라는 책을 보며 모험을 헤쳐나갈 힌트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이게 다야. '가서 해봐'
머리 아플 땐 연금술사 책 펼쳐본다는 말 한마디 하려는데 쓸데없이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하지만 앞으로 또 연금술사를 보고 인용해서 글을 쓰게 된다면 이 포스팅의 링크를 달아놓고 바로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좋은 일이다. 오늘 나로 하여금 연금술사를 펼치게 했던 고민은 '이 어렵고 많은 일,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었다. 그런데 꽤 재미있는 페이지가 나왔다.(p.95)
이 페이지의 내용은 주인공 산티아고가 모험에서 만난 동료 '영국인'이 연금술사를 만난 이야기다. 앞뒤 맥락을 설명하자면, 이 영국인이라는 등장인물은 연구자다.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든다는 '연금술'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항상 책을 읽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물려받은 부친의 재산까지 모두 써가며 연금술에 관한 서적, 자료는 모두 찾아보는 정도.
그는 이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 연금술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 연금술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상인의 행렬에 끼게 되고, 산티아고도 마침 피라미드를 찾다가 그 행렬에 합류해 있던 차에 친해진 것이다.
이 페이지에서, 영국인은 그렇게 찾아다니던 연금술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직후다. 산티아고는 그에게 '연금술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묻는다. 그러자 영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가서 해보라는 말이 다였어'(That's all he said:'Go and Try')
"He told me I should try to do so. That's all he said:'Go and try.'"
가서 해보라니! 가서 해보라니! 가서 해보라니!
참.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평생을 바쳐, 모든 재산을 바쳐서 물어보러 갔더니 가서 해봐라니. 고 정주영 회장님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 문단이 나에게 또 깨달음을 준다.
요즘 내가 회사에서 맡은 과제가 있는데, 아무래도 인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전에 없던 일을 하는 스타트업의 인사라는 건 더더욱 답이 없는 것이라 이 책 저책을 뒤져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행은 계속 늦어지고, 읽은 책의 내용만 머리에 쌓이는 기분이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참이었다. 마치 연구만 하는 영국인처럼.
영국인은 왜 책만 보고 할 생각은 안 했을까. 게을러서? 멍청해서? 아니다. 아마 겁이 났을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내가 지금 그렇거든.
실제로 뒤를 좀 더 읽어보니, 이 영국인이 이런 말을 한다.
"To do it successfully, I must have no fear of failure. It was my fear of failure that first kept me from attempting the Master Work. Now, I'm beginning what I could have started ten years ago. But I'm happy at least that I didn't wait twenty years"
"이 일을 성공시키려면, 실패에 대한 겁이 없어야 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내가 시도하는 것을 막는 첫 번째 장벽이었어. 지금 나는 내가 10년 전에도 시작할 수 있었던 일을 시작하는 중이야. 하지만 난 지금 행복해. 시도하지 않고 20년을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
나도 지금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이 일은 사실 일주일 전에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이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기쁘다. 더 미룰 수도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속 써야지 써야지 하고 미뤄왔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