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남존여비의 끝판왕, 33년생 친할머니

할머니의 세계는 오직 장손인 오빠가 다였다.

by 지은채

할머니의 세계는 늘 단순했다. 오롯이 '장손'. 장손이 다였다.


나의 10대 초반을 떠올리자면, 따스한 햇살 보다도 늘 장마철의 흐린 하늘이 먼저 그려진다.


그 시절 나의 위치는 명확했다.

오빠의 수발을 드는, 일명 '무수리'.


할머니는 여러 손주들 중에서도 유독 오빠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 말고는 현재 지씨 성을 가진 아들은 아무도 없었다. 우습게도 2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빠의 탄생은, 말 그대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기회인 셈이었다.


할머니는 오빠에게는 늘 '우리 장손', '내 새끼'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나에게는 '못순이', '계집'. '지지배'라는 다양한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어쩔 때는 욕이 섞이기도 했다.


내가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암투병과 사망.

그리고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늘 부재중이었던 아빠.


그 상황에서 밥 숟가락을 쥐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는 73살의 늦은 나이에 13살의 손자와 11살의 손녀를 떠맡게 된 것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특히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갓 4학년이 된 여자 아이에게는 정말이지 지옥과 다름없었다.


그 시절 기억은 웃기게도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기억 속에서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밥상'이다.


반찬 투정은 사치였다.


"할머니, 나도 계란 프라이 먹으면 안 돼?"


밥상 위 작은 계란 프라이 하나를 보며 물었던 말이었다. 다음 순간, 눈앞이 번쩍거리며 별이 빛나는 것을 느꼈고, 곧바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가시나, 니는 김치 하나로도 밥 잘 먹는다 아이가! 느그 오빠는 계란 없으면 밥도 안 묵는데, 그걸 뺏아먹고 싶나!"


난데없이 날아든 손찌검에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놀랬는지, 아프지도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는 부라리는 할머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 것을 뺏어 먹는 게 아니라, 나도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우리 장손, 많이 묵으라. 햄 구워줄까? 그러면 밥 먹을래?"


얄밉게도, 오빠는 할머니가 챙겨주면 챙겨줄수록 더 반찬투정을 했다. 나중에는 밥상에 소시지나 고기반찬이 없으면 숟가락을 들지 않았고, 행여나 억지로 김치를 먹이려고 하면 일부러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나도 햄 좋아하는데. 소시지도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는데.'


하지만 내 앞에 놓인 건 늘 마른반찬과 김치뿐이었다. 어쩔 때는 오빠 앞에는 반찬 그릇이 4개나 있었고, 내 앞에는 붉고 시들시들한 배추김치, 깻잎 무침, 그리고 고추장 종지가 다였다.


반찬이 김치뿐일 때는, 스스로 참기름 한 병을 가져와 밥과 김치 그리고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잘도 처먹는다'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고추장 범벅인 밥 한 숟갈을 먹으면서 오빠 앞에 놓인 동그란 소시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마치 입 속에 걸리는 김치 조각이 소지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웃기게도 반찬 투정을 하던 오빠는 성장이 더디게 되었고, 나는 평균으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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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는 항상 애벌빨래부터! 다림질은 덤으로!

본격적인 '무수리'의 삶은, 오빠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시작됐다.


초등학생이라는 어린이 티를 벗고, 교복을 입은 오빠는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찌나 감격하셨는지, 연신 교복 입은 오빠를 쓰다듬으며 '장하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교복을 입은 오빠가 대단해 보였다. 이제 진짜 '어른'이라는 착각이 들정도로 오빠는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교복을 입고 등교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복 셔츠 칼라는 손으로 문질문질해서 먼저 빨고, 세탁기에 넣어라."


할머니가 하얀 셔츠 하나를 내 앞으로 던졌다. 나는 그것이 오빠의 교복 셔츠인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내가?"

"그럼 네가 하지, 내가 할까?"


아뿔싸. 말 한마디가 꼬이면 바로 눈빛이 번쩍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손빨래라니. 정말? 그것도 오빠 교복 셔츠를?


방법이 없었다. 하기 싫다고 하면 할머니의 손찌검이 날아올 것이고, 매서운 눈빛이 숨통을 막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셔츠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친절하게도 셔츠 카라에 묻히는 세제 한통을 주고는 욕실 문을 닫았다.


나는 고무장갑도 없이 연신 오빠의 셔츠 카라를 문댔다. 그때는 기름보일러라서 따뜻한 물을 받을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셔츠를 물에 담갔다 꺼냈다를 반복했다.


14세 청소년의 땀배출은 어찌나 지독한지, 땀에 젖은 카라는 언제나 시커멓게 더러웠다. 한참 동안이나 카라를 문지른 후 세탁기에 넣자마자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옷 마르기 전에 다림질도 해놔라. 셔츠는 항상 다려 입어야 한다."


고작 12살인 나에게 14살 오빠의 교복 셔츠를 다리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단 한번 다리미의 사용법을 알려주고는 뒤돌아 나갔다.


멍하니 다리미와 다리미판을 보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다리미는 금방이라도 내 손에 화상을 입힐 것처럼 무서웠다. 게다가 혹시나 오빠 교복을 망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가득했다.


나는 조심조심 다리미를 들어 교복을 다렸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다리미에 손을 대기도 하고, 셔츠 끝에 누런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자국이 남을 때면 할머니는 또다시 나를 비난했고, 후에 나는 다른 천 하나를 대고 하면 자국이 남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 짓을 일주일에 두 번씩 반복하니 어느새 제법 솜씨가 생겼다.

나중에는 아빠의 셔츠도 추가되었고, 나는 일주일에 5벌의 셔츠를 빨고 다렸다.


그렇게 나는 손빨래와 다림질의 장인이 되었다.

1764284101845.jpg 주름지고 울퉁불퉁한 내 손. 고무장갑이라도 좀 주지. 콤플렉스다.



내 손으로 업어 키운 우리 집 장손!

할머니는 주말마다 본가에 내려갔다.

그럴 때면 편식을 하는 '지씨 가문 장손'을 위해 늘 소고기 볶음이나 장조림 같은 고급 반찬을 양껏 만들어 두곤 했다.


"느그 오빠 배고프다 하면, 밥이랑 볶아서 줘라."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몇 차례 얻어맞고, 욕을 먹으니 말대꾸는 사치가 됐다.

나는 그저 '알겠다'라는 말만 작게 중얼거렸다.


"은채야, 나 배고픈데."


조금 일찍 하교한 오빠는 집에 오자마자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그 말속에는 지금 당장 밥을 대령하라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저도 동생한테 얻어먹기는 미안했는지 내 어깨를 조물딱거리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렸다.


"할머니가 해주신 걸로 볶음밥 해줘!"

"내가 오빠 시녀가?!"


맨날 받아먹는 오빠가 미웠다. 오빠는 단 한 번도 집안일을, 아니 제 손으로 책가방 정리도 한 적도 없었다. 그런 오빠의 '배고프다'라는 말은 정말이지 질릴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나는 오빠의 무수리.

툴툴대면서도 주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커다란 프라이팬을 꺼내고, 식용유를 붓고 밥을 볶아 냈다.


찰기가 있는 밥을 강불로 볶아낸 후, 할머니가 만든 고기볶음을 넣으니 제법 그럴싸한 볶음밥이 만들어졌다. 그다음에는 오빠의 추가 요청으로 계란까지 깨서 넣어 그야말로 완벽한 중식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볶음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인분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다. 나는 은근슬쩍 내 몫의 밥까지 넣어 같이 만든 것이었다.


내가 오빠 밥을 차려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바로, 그 계란 프라이. 고기반찬.


이 시간이 내가 같은 반찬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같이 먹자."


할머니가 있을 땐 허락되지 않던 햄, 장조림, 계란 프라이를 오빠는 기꺼이 나눠줬다. 오빠는 한없이 철부지에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자신이 먹는 반찬을 나에게 아까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나도 차별받지 않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동생임에도 매번 오빠 밥을 챙겨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장점이라고 해야 할지, 어려서부터 배운 요리솜씨는 커서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식재료만 있으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요리 장인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 관련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끝이 없다.

어릴 때는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얼마나 몸부침을 쳤는지 모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

내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할머니가 시키는 것을 한 번에 따라 하지 못해서.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내가 못나서, 그래서 미움받는 거라고.


할머니는 언제나 '우리 아들', '장손'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셨고, 이 차별은 고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마지막 병원 수발을 든 사람은 그렇게 애지중지 싸매던 '아들'이 아닌 ''이었다는 것.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것도 '딸'이었다는 것.


할머니는 알고 계실까?

BD696AC3-A7A8-4D9A-A522-9D40F7949D4C.png 이제는 진짜 괜찮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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