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텅이에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내 앞의 작은 일들에 정진했던 3년차
※ Brave, Not Perfect 는 Girls Who Code의 정신이자 창시자인 레시마 소자니의 책 이름입니다.
지난 날의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하는 연말입니다.
저는 '어제의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늘 과거의 나에게서 영감을 받고, 늘 과거의 나와 겨룹니다. 올해는 과거의 나에게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전의 나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으며—무엇에서 그리 못했던 건지 이제는 잘 모르겠지만—불만족스러운 외부의 상황과 나 스스로의 능력 부족은 오로지 나태한 나 자신 탓이라는 생각을 했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가자, 라고 생각했지만 늪에 빠져 헛바퀴만 돌리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저는 여유를 잃었고,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았고 그럴 시도 조차 할 생각 없었습니다. 온 세상에 화가 났고, 사실은 무능력한 저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났습니다. "이게 정말 최선이야?"라는 끝없는 의심으로 저를 수렁으로 밀어넣었습니다. 회사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수치스러웠고' 어디 나가서 말하기 '부끄러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침내 제 인생이 실패해버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물나는 패배감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하지 못할 일인데 하겠다고 해서 쪽팔리게 되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이 모든 감정에 말 그대로 무너져버렸습니다.
긴 여행을 다녀오며 모든 것으로부터 강제로 거리를 두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많이 생각이 건강해졌지만 아직도 눈물을 참지 못했던 그 밤들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글은 올 한 해 제가 겪었던 어려움과 이를 헤쳐내기 위한 저의 노력의 기록입니다. 물 속에 갇힌 것만 같을 때 그 안의 나를 구하기 위해, 넘어져도 멈추지는 않았던 나 스스로의 기록, 혼자서 하는 시상식이랄까요.
저는 이번 달(2018년 12월, 총 18개월)까지 데이터센터에 상주하며 고객의 서버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금융권 고객을 담당하고 있고, 금융권 고객들은 보통 그 어떤 문제도 생기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 상태 그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운영팀에서도 굉장히 보수적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막연함 거부감이 있으며 이를 '귀찮아'하죠. 실제로 정말 자리에 앉아만 있다가 월급을 받는 것 같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IT는 업계 특성상 변화가 미친듯이 빠르고, 일 년 전에 썼던 것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황도 왕왕 생기며 끊임 없이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제가 9-6에 하고 있는 일은, 업계의 특성과 방향과는 조금 다르며 굉장히 안락하지만 빠르게 도태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인거죠.
저는 데이터센터 상주로 가기 전에 프로세스 관리자를 하면서 운영 업무가 어떤 것인지 대충 알고 있었고, 가서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기술적으로만 정진할 것이며, 만약 그런 사람을 실제로 일하면서 만나면 섞이지 않을 것이라고 절치부심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모든 사람에게 벽을 두른 채였고, 실제로 그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뭔가를 잘 모른다든지, 잘 못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죠. 일도 '잡일'처럼 느껴졌고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하기 싫었습니다. 몰입하지 못하니 실수가 많아졌고, 실수하는 저 스스로에게 "이런 것도 못해?"라며 실망하기 바빴습니다. 사무실에서 누가 제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 또 뭐 잘못했나요?"라고 대답했을 정도이니 뭐.
긴장만 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9-6를 계속해서 보냈고, 사람들로부터는 스스로 소외되어 버렸습니다. 하루의 1/3이 패배감과 무력감에 잠식되어 버렸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섞이지도 못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하고 내 인생이 어딘가 단단히 고장나버렸다는 생각에 매몰되어버렸죠. 조금만 마음을 열어볼 걸, 조금만 더 유연한 생각으로 내 앞의 모든 것을 대해볼 걸 하는 후회가 이곳을 떠날 때가 되니 듭니다. 세상 만사의 가치가 그걸 대하는 나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니 그 안에서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흔해빠진 격언을 왜 그때는 알지 못했는지 참.
지금 뭔가 잘못되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고 얼마 되지 않아서 개발 프로젝트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면서 추가로 해야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하고 싶다고 거의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제게 필요했던 활력과 새로운 자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개발 공부를 시작했고,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보이는 밋업에는 어지간하면 다 갔고, 어디든 오고 갈 때에는 개발 블로그를 읽었습니다. 요즘 핫한 프레임워크, 라이브러리, 랭귀지를 쓸 생각에 신이 나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운 쪽으로 틀어서 신나게 공부를 하니 9-6도 좀 견딜만 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니, 거버넌스와 레거시 코드의 높은 벽에 또 부딪혔습니다.
일단 PM이자 아키텍트였던 사람이 일을 전혀 하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굴러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책임 회피를 하고 싶었는지 온갖 핑계로 미팅에 나타나지 않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혼자 사활을 걸었던 저는 자발적으로 그의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제가 PM은 아니었으니 프로젝트가 굴러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다 말도 안되는 옛날 버전의 라이브러리로 점철된 레거시 코드까지 받았고 이걸 참고해서 개발하라는 애매한 디렉션을 받았습니다. 다른 프로젝트 멤버들은 "대충하자"라든지 "어차피 안돼"라든지 "그냥 받아온 코드로 얼른 만들어서 끝내자"라는 말을 했죠.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일을 이렇게 하는 걸까, 왜 굳이 이 레거시 레퍼런스를 가지고—레거시와 관계 없이 새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일인데—하자고 사람들이 이렇게 성화인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의욕은 '세상 물정 모르지만 열정적인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짓밟혔고, 돌파구를 찾았다는 제 희망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씻겨나갔습니다. 어거지로 실제 개발을 시작했고, 막상 시작하고 나니 너무 쉬워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를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말은 어디가서 시원하게 내뱉어놓고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설정하고 이걸 나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빨간 신호등에 달릴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주저 앉아버리고 마는 나에게 "사실 너 이렇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믿어봐,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왜 지금 니 눈 앞에 있는 거라고 못하겠어.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 제가 좋아하던 저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정말 작은 부분들을 찾아 그렇게 했습니다. 언제나 치사할 만큼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면, 마음먹기의 프로세스는 훨씬 더 쉬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장보기, 청소하기 등 하루 할 일을 모두 다이어리에 적고 해내고, 친절하게 대화하기부터. 미국 회장을 위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용기를 내 질문하기, 또 다른 큰 무대에서 손 들고 질문하기,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메일 보내서 점심 먹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걸 한다고 과연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되는가? 글쎄, 사람에 따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알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서 망설이지 않는, 무대를 두려워 않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그에 맞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상정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거죠. 그리고 늘 의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 하고 나니 기분이 좋지? 라고. 몇 번 작은 증명이 성공하고 나니,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 나의 삶을 컨트롤한다는 통제감은 덤이었죠.
훨씬 더 작은 단위로 일을 쪼개어 하기
특정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어떤 세부 동작이 필요한지 분절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판에 박힌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제현주의 <일하는 마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제가 어려운 일을 대할 때, 그리고 이걸 이겨낼 때 하는 행동을 글로 표현하면 정확히 이렇습니다. 대단히 어려워보이는 일을 "이렇게까지?"라는 수준으로 쪼개어 체크리스트에 적고, 하나씩 할 때마다 체크 표시를 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 API를 호출하여 DB에 넣어야 한다고 하면, 1) 보안 인증 부분에서 인증 정보를 인자로 넘기기 2) 내가 원하는 API 정하기 3) VO 정의 후 매핑하기 4) 콘솔에 찍기 ... 이런 식으로 하는거죠. 저는 아마 이렇게 쓰지 않았어도 대충 어떻게 샘플코드 보고 API를 호출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이루는 작은 행동들을 한 번 더 인식하고, 그걸 의식하며 코드를 짜고 완성해 나갑니다. 요가할 때 나비 자세를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내 근육을 인식하며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최대한 작게 일을 쪼개어 해내니 조금 더 일 자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잠깐 쉬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를 혹독하게 후려쳤던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했던 저의 작은 성취를 소개합니다. 쓰고 나니 기분이 좋으니 여러분들도 꼭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수영을 배움
언제나 늘 수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늘 미루었죠. 올해는 그래도 드디어 자유형을 마스터했습니다. 선생님이 남자 분들 못지 않은 체력과 속도라고 칭찬도 해주셨습니다(ㅎㅎ). 두 달만 하고 그만두었지만 막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해내서 뿌듯했습니다.
한 프로덕트의 풀스택 개발
태어나서 처음 올해 4월에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가 nodejs 기반으로 갈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기 때문에 javascript 만 공부했고, 백엔드는 python을 쓸 수도 있다길래 그럼 python 학원도 갔습니다. 근데 또 갑자기 레거시 코드 대로 java를 쓴대서 좌절했었죠. 객체지향언어의 벽은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한 기능의 프론트엔드와 백엔드 모두를 책임지는 어엿한 개발자가 되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영역이었지만, 발견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더 깊어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지난 날의 제가 고맙습니다.
브런치와 블록체인 기술 블로그
블록체인 기술 블로그를 오픈했고, 5월 말 첫 포스팅 이후 약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1만 5천뷰, 완독률 61% 라는 생각보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프라이빗 플록체인에 대한 '기술' 블로그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느낄 수 있었죠. 제가 익명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처럼, 저도 커뮤니티에 환원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는 제 글을 찾아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죠.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브런치를 오픈했습니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처음에 대충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탈락! 아니 암만 그래도 블로그면서 뭘 탈락까지 시켜, 하고 뾰루퉁했지만 사실 좀 상처를 받았죠. 제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좀 정리가 되고 나서 다시 신청을 했고, 생각보다 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댓글들과 소중한 피드백에 힘을 얻었습니다. 대단할 것 없는 글들과 저의 생각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다른 그 어떤 포스팅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도록 싫었던 제 자신을 돌이켜봐야 하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힘든 때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계속 하겠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