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전씨 Dec 30. 2019

2019년의 조각들

하루하루는 치열하게 전체적으로는 되는 대로 살아봤더니 내게 남은 조각들

올해를 한 장면으로 요약한다면 11월에 방문한 발리에서 패들보트를 탔던 때를 꼽을 것이다. 오후 4시 정도 되는 시간이었고, 쨍쨍한 햇볕이 따사롭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멋지게 석양이 지고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디선지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유유히 어딘가를 바라보며 나 스스로가 간지 난다고 생각하며 노를 저었다. 근데 저 뒤에서 직원이 쫓아와 여기로 가면 암초라고, 부딪히지 않게 반대편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사실상 바람이 미는 곳으로 밀려왔던 것. 나는 그래서 다시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전보다 훨씬 더 세게 노를 저어야 했다. 보트는 자꾸 한쪽 방향으로 휘었고, 어떤 때는 배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무거운 노를 서서 양쪽으로 저으려니 팔부터 등까지 뻐근해졌다. 내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렸나, 출발점이 아득하게만 보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더니, 전력을 다했더니 다시 시작했던 곳으로, 원래 내가 있었던 곳으로 결국 도착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만났고, 이직 준비를 빡세게 했고, 퇴사했고 입사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새로이 만났고,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고, 누군가에게는 씻어내 지지 않는 은혜를 받았다. 회고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작년 회고 브런치를 꺼내어봤는데 올해 못지않게 정말 다사다난했다. 이렇게 다사다난하게만 살아지기도 하는 건가 싶을 정도?! 2018년에는 내가 어떤 시련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주요하게 돌아보았다면, 2019년 회고는 올 한 해 나를 관통했던 주제들을 찬찬히 돌아보고자 한다. 각 부분에 2020년에 조금은 달리하고 싶은 것들을 짧게 달아보았다.



절이 싫어 떠난 중, 다른 중들이 싫었던 건 아니긴 한데요

절을 떠나면서야, 함께 했던 중들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로소 느끼게 된다. A 실장은 업무 시간 이후에 따로 한 시간씩 통화로 일 얘기를 하고, 나에게 "나는 지원이 여기 밖에서도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래"라고 말하고는 했다. 내 퇴사가 서운했는지 같이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았는데도 나에게 논의하지 않는 뒤끝을 선사했다. B 차장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몇 번 큰 무리로 식사를 한 적은 있으나 그렇게 대단히 유대감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나의 마지막 날, 그는 휴가인데도 출근해서 나와 커피를 마셨다. 처음으로 단 둘이. 헤실헤실 웃으며 나에게 장난을 잘 치던 C 실장은 내가 신입사원 때는 안 그러더니 싸가지 없어졌다고 퇴사 후 두 달 동안 뒷담을 깠다. 그런가 하면 D 과장은 말 몇 마디 해보지 않았는데 내 송별회 때 내 취향까지 기억한 선물을 사다 주었다. 회사 다니면서 나에게 살가웠던 사람들 중 일부는 기가 막히게 퇴사 통보 이후에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에 비해 몇 마디 많이 해보지 못한 이들은 내게 편지까지 써주었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란 참 어렵고 희한하고 나름 5년 차 직장인인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4년을 꽉 채우고 새로운 곳에서 5년 차의 포문을 열었다. 낯설고 외로웠다. 내가 있는 업계는 인력 풀이 넓은 편이 아니라, 나의 전 직장 동료들이 현 직장에 많이 포진되어 있었음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해서 만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새로운 절에서 만난 새로운 중들은 까칠했다. 전 직장이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 같았다면 현 직장은 개똑똑하고 개쎈 친구들 같은 느낌. 그래도 그 사람들과 한 마디씩 쌓아가면서, 어딘지 모르게 자꾸 이전 절의 중들이 생각나면서, 내가 그래도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지냈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언젠가 여기도 떠나게 되겠지? 평생 전 직장에서 머무를 거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미련 전혀 없이 새로운 곳에 와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나도 장벽을 거두고 잘 지내보아야겠다.



잘 되기는 했는데, 바랬던 게 그게 맞아?

올 한 해 고민 없이 달렸다. 목표한 바가 있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 달렸다. 그리고 이뤘다. 어디로 뛰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도착했다. 전혀 다른 목표를 갖고 최상의 노력을 해야만 올 수 있는 곳에 왔다. 도착하고 나서도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목표라고 생각했던 게 있었으니,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있는 업계 1위 회사에 왔는데도 가끔은 딴생각이 든다. 조금 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해보고 그때 올 걸, 이런 생각. 이 곳에 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으며, 채용 과정 내내 나는 절박했다. 그리고 결국 도착한 이곳에서 세 배 정도 더 행복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목표를 명확히 한 상태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지금 이 곳에서의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적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이걸 잘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어떻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지도. 이제는 조금 더 얻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 영리하게 움직이자.


이러나저러나 나는 커리어적으로 두 뼘 정도 더 성장했다. 작년의 나에 비해. 그리고 계속해서 그 속도를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나, 무엇이 되고 싶나, 지금 그것을 위해 여기서는 어떻게 지낼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은 너무도 턱없이 부족했다. 생활이라는 것이 어찌나 무서운 것인지. 예전에는 회사원이 아닌 나를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회사원이 아닌 나를 상상할 수 없다. 회사라는 틀 안에서 성장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지만, 월급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겪어야 하는 문제들을 지나다 보면 현타 맞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 자신을 가장 궁금해하고 알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올 한 해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내년에는 조금 더 착실히 나의 겉과 안을 돌보아야지.



Empowered Women Empower Women

올 한 해는 정말 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 쓰러져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을 때 핫펠트의 노래를 들었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 한 숨 돌려야만 할 때 재재를 보았다. 걸캅스에 10개 정도의 영혼을 보냈고, 윤가은 감독과 김보라 감독의 영화를 보며 웃다가 코 끝이 찡해졌다를 반복했다. 혼자 남은 방에서 최은영, 윤이형, 정세랑 작가의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박막례 할머니 책을 읽다가도 지하철에서 찔끔했다. 힘이 조금 더 필요한 날, 황소윤과 림킴의 노래를 들으며 힘차게 고개에 힘 빡 주고 걸었다. 헤이조이스 이나리 대표의 강연을 들으며 영감을 받았고, 강경화 장관의 짤을 보면서 감명받았다. 설리와 구하라 때문에 울었고, 더 잘 살아내리라고 다짐했다. 내 옆의 수많은 유능한 여자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던 날들을 이겨냈다. 다른 선배가 나를 위해 그러해주었듯, 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조금 더 양질의 커리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감사하게도 두 분은 지금 나의 회사에 인턴으로, 한 분은 나의 이전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가기를 선택하셨다. 또 회사에서는 전혀 모르는 바다 건너의 여성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분노하고, 우리 앞에 주어진 큰 무대에 곧 같이 서서 주인공으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내년이라고 우리가 덜 힘들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정말 해낼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를, 증명해 보여야 했던 상반기였다. 나 실력 부족하다. 그것은 슬프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 그렇지만 부족한 나의 등을 밀어준 것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성찰도 고민도 그 무엇도 없는 것 같았던 그 과거의 나였다. 그때의 내 등을 다독여주면서, 마지막 면접 전에 썼던 일기를 인용하고 2019년의 마지막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스스로를 멱살 잡아가며 살아가는 분이 계시다면 남은 며칠 만은 부디 스스로에게 자상하시기를 바란다. :)


불안과 함께 앞으로 가는 연습을 한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을 안고 다음 단계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곧 끊어질 것 같은 선을, 얼마 남지 않은 나에 대한 믿음을 끌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가고 있다. 왜 이런 것도 몰라, 왜 이런 것도 공부 안 했어, 왜 과거에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어, 남들은 다 이만큼 잘했는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해, 자책과 자책과 자책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 휘청했을 때 다행히 붙잡아 준 이가 있었고 내 손을 잡고 같이 울어준 사람이 있었다.  

빈틈없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미처 감추지 못한 구멍은 계속해서 남는다. 시장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이 되어보니, 내 구멍은 어디였고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프게 배운다. 나의 무능과 불안을 한아름 안고 당장이라도 내팽개치고 싶은 마음도 얹고서 조심스레 떨리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Be Yourself 가 충분할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과 생각해보니 별 거 아니라는 담대함으로.


작가의 이전글 이직에 뛰어들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