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잘러 꿈나무가 일잘러 꿈나무에게
나는 지난 7월 부로 5년을 꽉 채운 6년차가 되었다. 지난 기간 동안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신입 사원 채용이 내 뒤로 끊기는 바람에 5년을 내리 막내로만 지냈다. 그러다 약 2주 전 내 커리어 역사상 처음으로 '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의 멘토가 되어 달라는 매니저의 요청을 받았는데 거절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하면서 지냈기 때문이다. 늘 내가 어딘가가 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기술적으로, 인격적으로 나 스스로를 채우는 것 이외의 일에는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았을 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안 했으며 관심도 아예 없었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우스개소리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후학양성'에는 큰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그런 상태로, 즉 무방비 상태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느꼈던 이 회사의 좋은 점, 안 좋은 점을 이야기 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5년 전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모두가 스타 플레이어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그런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다.
나는 이전 브런치에서 줄줄 이야기해왔던 것처럼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Ops 내지 PMO 같은 역할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나는 팀 내의 결과를 수집하고 하나의 통합된 보고서를 만들고, 본사에서 나오는 이니셔티브를 한국에 적용하는 일들을 주로 했다. 약 1년 전의 나는 이 시절을 '완전한 낭비'라고 평가했다. 처음부터 엔지니어였다면 지금 얼마나 편리했을까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1년이 더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신입사원 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은 나도 모르게 나의 기본기가 되어주었으며, 이때 쌓은 스킬인 줄도 몰랐던 스킬들이 나를 더 멀리 나아가도록 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신입사원 때 주로 했던 일은 위에 간단히 말하기는 했지만, 요약하자면 남한테 무언가를 시키는 일이었다. 주요한 일의 흐름은 1) 내가 시켜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2) 메일 수신자가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메일 쓰기 3) 2일 기다려보고 '쪼임' 시작하기 4) 성과 보고하기 이다. 이 일에 실증이 나던 시점에는 이 모든 것을 '잡일'이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조금 시각을 바꾸어보면 이는 '어느 직무를 하든 반드시 잘해야 하는 일'이다. 어느 직무를 하든지 특정 시점을 지나면 작은 규모라도 팀/TFT/소그룹 등등을 이끌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를 일하게 하는 힘을 커리어 시작 단계에서부터 다지면, 상대적으로 피어들이 이 역량이 없을 때 먼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면 조금 더 큰 규모로의 확장은 시간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조금 더 큰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결국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게 포함된다. 이런 시키는 업무를 하다보면, "왜 해야 되는 건데요?" 라는 반발을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나는 처음에 이걸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서 '위에서 시키니까요ㅎㅎ' 정도로 갈무리했다. 이건 저연차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방패막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하는 나 스스로는 너무도 괴로웠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나 스스로 납득이 잘 되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의 존엄성을 위해서라도 되도록 일의 맥락과 목적과, 외국계의 경우 본사의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메일을 잘 쓰기란 정말 쉽지 않고 나 역시 잘 쓴다고 자부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예전에 내 메일을 보고 어떻게 쓰는지를 좀 알려줘도 좋겠냐는 친절한 과장님이 있어서 나도 깨달은 부분이었다. 그 때가 이미 2년차가 넘었을 시점이었으니 내 지난 이메일을 보면 가슴이 갑갑해질 것 같다(^^;;). 그 뒤로 내가 고수하고 있는 원칙은 아래와 같다.
* deadline을 명확히 지정하여 메일 제목에 적기 (ex: [ProjectName] 진행상황 업데이트 요청 by 8/20(목) EOD)
* 메일이 길어질 것 같고,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tldr (Too Long, Didn't Read)을 상단에 적는다.
* 핵심 부분 (deadline, action item...)에 하이라이트
* 개인마다 해야 하는 일이 나뉘는 경우, 표를 만들어서 개인마다 해야 하는 일을 명확히 해준다.
* 히스토리 요약, 정보 공유를 위해서는 Bullet list + Numbered list 을 적절히 활용하기
그렇지만 나 역시 전문가는 아니므로 과거에 강연을 들었다가 큰 감명을 받은 Stibee의 관련 이메일 가이드를 참조해보는 것이 좋겠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9141277&memberNo=31994377
메일을 보내고 2일이 지난 뒤, 대상자가 많지 않다면 메신저/전화를 통해 status check를 한다. 이해는 잘 되었는지, 하면서 궁금한 점은 없는지, 뭐 도와줄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사람들이 데드라인이 되어서야 일을 하는 경향이 있고, 그 때에 방향을 잘못 이해했다든지 하면 데드라인을 결국 수정하게 될 수 있다. 이는 '아 얘는 융통성이 있구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시키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그림은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미리 여유 있게 방향 체크를 꼼꼼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남들이 해준 일들을 바탕으로 내가 최종 보고를 하게 된다면, 결과 보고 역시 깔끔하게 bullet point로 최대한 정량적인 수치를 가득 넣어서 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내 의견보다 데이터를 더 보고 싶어 하므로. 그리고 메일 말미에는 꼭 Thanks to를 적는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쟤는 일을 잘해, 못해. 근데 일 잘하는 게 무엇이냐고 되물으면 선명한 대답을 주는 사람을 별로 없다. 나는 지난 커리어에서 굉장히 괴로웠던 것이 이 지점이다. 일 잘한다는 것의 정의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매니저에게 의탁했다. 매니저가 나보고 잘한다 그러면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고, 나보고 못한다 그러면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때는 매니저가 칭찬하던 나의 모습을 단점이라고 칭하며 일종의 공격을 해왔다. 나는 그 때 나 스스로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적으로 매니저에게 위임한 상태였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매니저에게 인간적으로 실망했다. 일에 대한 정의와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소홀히 했던 대가였다.
신입사원일 때는 나를 뽑아준 사람, 나의 팀장, 나의 인사 매니저가 세상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채용이 되는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되도록 빨리 거기에서 탈출해서 '일'과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외부의 풍파와 인류애 상실하게 되는 사건들에 맞서 단단하게 서 있을 수 있다.
이런 기준을 빨리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한다. 신입사원이었던 내게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아는 것’이 회사 생활의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고 늘 이야기해주었다. 그때는 그 말이 너무도 쉽고 편리하고 게으른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고, 뭐 아는 사람 많으면 좋기는 하겠지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래도 뭐 사람들을 만나라니까 아예 무시할 수는 없어서 만나기는 만났는데, 워낙에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일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몇 번 하다가 관뒀다. 내 일을
잘하는 게 더 우선순위가 높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시간이 나면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과 1:1 미팅을 하려고 한다. 시간은 길지 않아도 된다. 30분 정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된다면 온라인으로도 좋다. 그들의 커리어 저니를 물어보고, 각각의 단계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묻고, 일과 삶의 밸런스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일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지, 커리어의 최종적인 목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 생각보다 나랑 비슷하게 고민을 별로 안 해본 사람도 많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 나만의 인터뷰집을 쌓아가며 나 역시도 일과 일잘러의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요즘 친구들은 조금 더 빨리 이 과정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본인의 sanity를 위해서..!